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을 심리 중인 헌법재판소는 12일 심리를 신속히 하겠다면서도 시일이 오래 걸리는 법리인 변론주의를 내세웠다. 헌법기관의 자율성을 앞세우면서도 촛불과 양심 세력들이 요구하는 신속 결정을 외면한 것이다.
헌재는 탄핵심판 관련 재판관 회의를 연 뒤 "탄핵심판은 변론주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당사자가 주장하는 쟁점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선별적 심리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헌재가 변론주의를 선택한 것은 자율 사항이다. 하지만 초미의 국가적 관심사 처리에 대한 논리로 그게 타당할까 의문이 든다.
헌재는 변론주의를 앞세웠는데, 법 이론이라는 것이 다양하고 각 이론마다 제 각각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즉 장기간 소요가 불가피한 법리주의를 앞세운 것은 최고헌법기관이라는 '완장'의 위세를 과시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그치지 않고 법률적 '갑질'이 아닌가하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박 대통령은 촛불 수 백 만 명의 요구에 따라가 국회가 탄핵 의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운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헌재의 법리 선택은 박 대통령의 이런 국치스런 작태를 장기간 지속시킨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하겠다.
참고로, 법 이론은 다양해서 자연법론, 실증법학이 대립하는가 하면 국내법 우위론이 국제법 우위론과 공존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어서 특정 이론을 금과옥조처럼 내미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상식에 반하는 지식 색맹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최고법률기관인 헌재가 법학개론 첫 장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설익고 속보이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된다. 혹시 국민을 개돼지로 보지 않는가하는 불쾌감이 들 정도다.
변론주의는 당사자가 판결의 기초가 되는 사실과 증거의 수집을 책임지는 주의로, 법원이 적극적으로 사실과 증거를 조사하는 직권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라는 것은 법적 기초 상식이다. 현행 민사소송법은 변론주의를 채택한다는 명문 규정은 없고 민사소송규칙 등에 변론주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직권주의는 법원이 실체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건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피고인 신문·증거조사 등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헌재는 지난 2014년 12월 '이석기 전 의원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대법원의 판결에 앞서 내놓으면서 직권주의를 채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헌재가 1987년 구성된 이래 헌법질서를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치를 강화하는 것과 반대의 결정을 한 것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석기 전 의원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다. 당시 헌재의 결정은 지하혁명조직인 RO의 실체를 인정한 것에서 나왔지만 대법원은 그 후 내린 동일한 사건 판결에서 'RO는 실체가 없다'고 판단했었다. 헌법에 의해 독자적인 권한이 보장된 두 기관이 상이한 결론을 제시한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헌법에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맹점이 드러나면서 어떤 후속 조치도 나온 바 없다.
대법원은 지난해 1월 22일 "RO는 사건 제보자의 추측에 불과하다. RO의 실체는 없고, 내란을 일으킬 것으로 합의하지 않았으며 특히 지휘 통솔 체계부터, 강령, 목적 등 조직의 실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내란 음모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지하혁명조직 RO를 주도하는 이 전 의원과 130여 명이 모여 내란을 꾸몄다는 혐의로 기소한 것에 대한 판결이었다.
헌재는 대법원 판결보다 한 달 앞선 선고공판에서 RO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결정문을 통해 "이석기를 비롯한 피청구인 소속의 '내란 관련 회합' 참가자들은 북한에 동조하여 국가 기간시설의 파괴, 무기 제조 및 탈취, 통신 교란 등 폭력 수단을 실행하려 했다"고 밝히면서 정당 해산과 더불어 국회의원 의원직 또한 상실된다고 판시했다.
헌재는 대법원과 달리 일사불란한 조직의 특성부터, 내란의 실행 계획까지 사실로 인정하면서 통합진보당 해산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헌재는 진보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한 것이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고, 국회의원의 국민 대표성 또한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대통령과 당시 황교안 법무장관이 앞장섰고 헌재가 대법원 판결에 앞서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진보당 해산은 '법치'에 대한 사회적 혼란과 불신을 심화시켰다. 동시에 정부 전반에 대한 신뢰성을 추락시켜 오늘날과 같은 박 대통령의 조기 퇴진으로 비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의 국기 문란 사태에 대해 헌재의 책임이 적지 않다 할 것이다.
헌재는 헌법 제6장에 의하여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등 5가지의 헌법재판권한을 행사함으로써 헌법질서를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다. 헌재가 신속한 탄핵 결정을 통해 국정 혼란을 조기에 종식시키고 법치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박근혜 게이트는 박 대통령이 피의자, 공범으로 포함된 범죄혐의가 다수이고 그 주요 혐의가 헌법과 민주주의 위반이라는 국기문란에 해당해 혐의 사실 가운데 하나만 심리를 해서 탄핵 사유가 된다면 그것으로 탄핵 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일부 전직 헌재 재판관의 견해다.
국회는 박 대통령 탄핵 사유로 국민주권주의 위배 등 헌법 위반 5건, 뇌물수수 등 실정법 위반 4건 등 총 9건을 제시했으니 헌재는 이 가운데 죄질이 가장 무거운 위헌 5건부터 심리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이들 5건 가운데 하나만 탄핵 요건에 해당한다고 하면 탄핵을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헌재가 모든 탄핵 사유를 다 심리한 뒤 다수의 사유가 인용 사항이 된다고 해서 대통령을 여러 번 탄핵할 수도 없고 그로 인한 실익도 없어 보인다. 헌재의 태도는 심리에 불필요하게 상당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는 낭비적 요소가 너무 크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국정 공백과 혼란을 조기에 해소해야 한다는 촛불의 요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이는 초등학생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헌재가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면서 시대정신에 정면 도전한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헌재의 태도는 김기춘 전 청와대 실장을 조소하는 호칭인 '법률 미꾸라지'를 연상케 한다.
박근혜 게이트 사건은 세계가 주시하고 있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민생 등 국내 제반 문제가 산적한 현실을 고려할 때 헌재가 시간 끌기를 한다는 의혹이 커질 경우 촛불은 헌재를 향할 것은 자명하다. 촛불이 평화적인 법질서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데도 이를 허접한 법 이론을 앞세우는 식으로 찬물을 끼얹으려는 발상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헌재는 법에 의한 지배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주목하면서 특정 이론의 뒤에 숨지 말고 법적 양심을 최우선해서 무엇이 최선의 탄핵 심리 방식인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헌재가 만약 헌법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촛불 민심에 역행하는 행위를 지속한다면 헌재는 역사의 심판 대상이 되어 그 존폐에 대한 논란으로 불거질 것이다. 그 이전에 촛불이 퇴출을 요구하며 지탄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