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세력'으로 신분세탁하는 '부역세력'들

[주장] 촛불은 개헌을 요구하지 않았다

등록 2016.12.26 10:41수정 2016.12.2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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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이다.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초의 영왕이 키가 작은 그를 빗대 "제나라엔 당신 같은 사람밖엔 없느냐"고 깔보았다.

"제나라는 대국엔 큰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고 소국엔 저처럼 작은 사람을 보냅니다."

말 한마디에 소국의 왕이 되어버린 영왕이 마침 제나라 출신 죄인이 문밖을 지나가자 다시 물었다.

"저 도둑질을 한 죄인은 제나라 사람이다. 제나라는 도둑들의 나라인가."

잠깐 생각한 뒤 안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나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나라에 오면 도둑질을 합니다. 초나라의 풍토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남에선 귤이었던 것을 회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는 이치입니다."

귤화위지(橘化爲枳). 회남에 심은 귤을 회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풍토와 환경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는 역사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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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소망 담은 '촛불' 24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즉각퇴진 9차 범국민행동’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박근혜 탄핵과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촛불을 모아두고 있다. ⓒ 권우성


정치권에서 한창 논란인 개헌을 생각해보자. 지금 정국에서 씨앗을 심으면 그 열매는 귤이 될 것인가. 탱자가 될 것인가.

87년 6월항쟁은 개헌 자체가 목적이었다. 구호도 '호헌철폐 독재 타도'였다. 체육관 선거를 혁파하고 국민들이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자는 직선제 쟁취가 항쟁의 목표였다.


이번 촛불 혁명은 어떤가. 개헌하자는 혁명인가. 수차례 있었던 주말집회에서 단 한 번이라도 개헌하자는 구호가 나온 적이 있던가. '당장 개헌'을 주장하는 분들은 돌아오는 주말집회에 나가서 '지금 당장 개헌하라'는 구호를 직접 외쳐보시라.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구호를 외치는 즉시 시민들이 '지금 뭣이 중헌지'를 잘 알려줄 것이다.

개헌이슈를 처음 제기한 건 다음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다. 최순실이 숨겨진 제2의 대통령이었다는 게 들통나고 나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난데없이 국회에 와서 던진 게 개헌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땐 다들 박 대통령이 개헌을 방패로 내세워 궁지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즉각적인 개헌 논의가 불붙지 않았던 건 그런 대통령의 꼼수를 모두가 다 알았기 때문이다.

개헌 논의가 나라를 망친 세력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건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꼼수를 던지던 때와 달리 지금은 일부 야권 세력이 가담함으로써 탄핵의 와중에 정치권의 돌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탄핵의 완결까지 명확하게 견지해야 할 전선을 흩뜨리는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권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부역세력'에서 '개헌세력'으로 신분세탁을 하려는 비박계이고 또 하나는 개헌을 통해 권력분산이 아닌 권력 나눠먹기를 하고 싶은 일부 야권세력이다.

개헌 이슈는 박 대통령과 전직 부역 세력에겐 꽃놀이패다. 실제 개헌이 되고 좋지만 논의만 거세게 불붙더라도 그들의 죄과가 희석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대선전 개헌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이 내심으로 원하는 건 '개헌' 자체보다는 '개헌의 논의'가 부각되고 가열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지만 개헌 깃발을 치켜들면서 관심을 개헌으로 쏠리게 하고 그것으로 '박근혜를 만든 세력', '박근혜의 부역세력'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개헌세력'으로 그들은 신분세탁을 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친일 부역세력'이 해방과 동시에 '반공세력'으로 표변해 온전히 살아남았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개혁보수신당'를 내세우며 친박과 차별화를 하고 있지만 비박계를 이끌고 있는 김무성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북한에 팔았다며 국민들을 속인 종북몰이의 대명사다. 또 딸의 교수임용 청탁, 사위의 마약설 등 각종 추문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유승민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시절 그의 비서실장이었다. 과거 황교안 총리 내정자의 인사청문회에서 부적격사유가 쏟아졌음에도 이를 막고 청문회 통과를 주도해 현재의 황교안 총리를 만든 새누리당의 전 원내대표다. 사드 배치에 앞장선 강경파이기도 하다. 이들은 사람도 과거도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비박계는 개헌을 하지 않으면 최순실 사태가 또 발생할 것이라면서 국정농단 사태의 근본 원인을 '박근혜'에서 '헌법'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헌법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다. 헌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최순실'에 의한 통치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이 헌법을 무력화하고 파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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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이 박근혜다" 24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즉각퇴진 9차 범국민행동’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총리 구속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박 대통령과 비박 부역세력이 가해자고 헌법은 피해자다. 헌법을 바꾸자는 건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겠다거나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의 원인이 '헌법'이 아니라 '박근혜'이기 때문에 헌법을 백날 바꿔봐야 박 대통령의 유전자를 가진 부역세력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다면 국정농단 사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일부 야권은 이런 비박계의 전략에 부회뇌동하고 있다. 대선전 개헌을 통해 권력의 일부라도 확보하길 원하는 '권력 나눠 먹기'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개헌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불과 몇 달 후면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고 곧바로 개헌 논의가 시작될 텐데 박근혜와 부역 세력의 신분세탁을 용인하면서까지 '지금 당장' 개헌을 해야 하는 것인가.'

헌법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 개헌의 내용에 대해서도 국민들에게 제시된 바가 없다.

이미 연구된 내용들이 많이 있어 두 달이면 개헌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국민들은 정작 연구된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

대통령제인지 내각제인지, 대선거구제인지 소선거구제인지, 중앙과 지방의 분권은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국민의 기본권은 무엇을 더 강화할 것인지 등 헌법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 정치권에서는 아직 어느 것도 국민에게 제시한 바가 없다.

개헌은 민주적인 새 정부가 구성된 이후 진행될 국가대개조 작업의 최종 종착지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전히 권좌에 있고 그의 아바타인 황교안 권한대행이 군림하는 지금의 탄핵 정국에서 시간에 쫓겨가며 급조해 진행할 일이 아니다.

당장 개헌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특정 야권주자에게 '대통령 다 된줄 안다'는 비난을 하기 전에 '내가 혹시 탄핵이 다 된 줄 알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자문해 봐야 한다. (대통령 다 된 줄 아는 건 그 대권주자가 아니라 황교안이다.)

개헌을 던져주면 정치권은 그걸 붙잡고 갑론을박하느라 정신없을 것이고 그 틈에 빠져 나갈 수 있다고 박 대통령이 생각했다면 그는 지금 성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최종 탄핵과 즉각 퇴진운동에 집중되어야 할 국민적 관심과 에너지를 개헌으로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적군이 도망가면서 추격을 늦추려 버리고 간 전리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전리품은 나중이고 추격부터 계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외롭다. 빠져나간 적군은 언젠가 제2의 최순실이 되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개헌 #최순실 #박근혜 #비박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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