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많은 우리는 '세월호 세대'
카메라로 기록한 세월호 그 이후

거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지켜본 세월호 참사 이후의 이야기

등록 2017.01.09 16:53수정 2017.01.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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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천 일 전인 2014년 4월 16일 아침, 진도 근처에서 커다란 여객선이 옆으로 기울었고, 점점 차갑고 어두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전원 구조'라는 어처구니없는 오보를 뒤로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들이 빛을 내며 하늘로 올랐다. 하지만 정말 무심하게도 그 배는 조금씩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조명탄을 따라 삼백 하고도 네 개의 빛도 함께 하늘로 올랐다. 그 수많은 빛들이 오르면서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에 뜨거운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불에 덴 흉터, '화인(火印)'으로 남았다.

우리는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천 일이 지났고, 그 흉터, 화인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아마 평생 남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낙인은 "나, 혹은 내 가족의 일이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마치 만년설 같아 보이던 무관심을 점차 녹였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유가족들의 호소에 사람들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함께 하도록 하는 데 꽤나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한켠의 상처와 유가족들의 피눈물 가득한 호소 끝에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옷이나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사고' 가 아닌 '참사'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가슴팍에 그 상처가 아로새겨질 때의 아픔과 슬픔을 잊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자고, 기억하자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결코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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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7일, 광화문 광장의 시민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1월 7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피켓과 촛불을 들고 유가족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 장성열


내가 지켜본 세월호 '사건'

소설가 박민규는 세월호 참사를 두고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이 사건,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았음'이 중요한 골자가 되었고, 그 골자를 빼놓고서는 세월호 참사와 이후 천 일 동안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국가는, 그리고 정부는 자신들이 자국민을 '사고'에서 구조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책임지기는커녕 사람들의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세월호의 흔적을 벅벅 긁어 없애고 또 망각을 강요했다. 국가와 정부는 이 참사가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자신들에겐 책임도, 또 책임을 질 의무 따위도 없다고 말해왔다.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은 자신이 그날 무려 7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 대해 일언반구의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하지 않았고, 참사 1주기 때는 해외 순방을 떠나기도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햇수로 3년이 된 참사에 대해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헷갈린다는 투의 말을 하며 자신은 세월호 참사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교통사고'를 들먹이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거나, 이외에도 지겹다는 말과 배상금 문제를 운운하며 입에 담지도 못할 조롱과 공격을 퍼붓는 이들도 숱하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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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1일, 피켓을 든 유가족들 2015년 4월 11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광장 북단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루액을 뿌리며 행진을 막았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최루액을 온 몸으로 막아가며 충돌을 멈추었다. ⓒ 장성열


나는 2014년 8월부터 세월호 참사 이후의 여파들에 대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내가 약 2년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리에서 보고 느낀 국가의 무책임과 망각에의 강요는 경찰 공권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을 통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경찰은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가겠다는, 혹은 고립되어 있는 이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유가족들과 연대자들을 차벽과 방패, 바리케이드로 막아섰고 2014년 4월 16일 그때처럼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최루액과 물대포를 쏴서 윽박질렀고, 도로교통법과 집시법 등을 들먹이며 해산을 종용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린 것도 모자라, 도리어 국가가 자신들의 무책임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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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1일, 경찰벽 앞의 유가족들 2015년 4월 11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광장 북단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최루액을 뿌리며 행진을 막았다. 그러자 유가족들이 최루액을 온 몸으로 막아가며 충돌을 멈추었다. ⓒ 장성열


공권력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비열했다. 2015년 4월 11일에는 광화문 광장 북단에 차벽과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행진을 막았다. 광장에서 어떻게 도로교통법을 이야기하냐는 항의에 경찰은 최루액으로 대응했고, 유가족들은 자신들과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최루액을 맞는 것을 못 보겠다며, 자신들이 앞으로 나가면 경찰이 최루액을 쏘지 않을 거라며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충돌의 맨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대원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최루액을 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도, 가리지 않고 최루액을 발사했다. 유가족들이 맨 앞에서 온몸으로 사람들에게 향하는 최루액을 막으며 겨우 충돌을 멈추게 했는데, 그 장면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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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8일, 차벽을 뚫고 앞으로 가는 시민들 2015년 4월 18일에는 경찰이 광화문 앞에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시민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갔고, 결국 차벽과 물대포, 최루액을 뚫고 광화문에 도달했다. ⓒ 장성열


그리고 바로 일주일 뒤인 4월 18일에는 소수의 유가족들이 광화문 앞에서 고립된 채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음식은 물론 화장실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경찰은 마치 성을 쌓는 듯 겹겹의 차벽으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또 시민들이 길을 지나가겠다고 해도 옷이나 가방에 노란 리본이 달려 있으면 '광화문에 가는 것이 아니냐'며 통행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시민들은 펜스를 뚫고 차벽 아래 좁디좁은 틈으로 기어들어가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경찰은 거기다 대고 마치 게임을 하는 것마냥 물대포와 최루액을 조준 사격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끽해야 얇은 비닐 우비를 입고 있었는데, 그 우비만으로 견디기엔 물대포는 너무 차갑고 강한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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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0일,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 기억교실이 단원고등학교에 남아 있던 작년 3월, 취재를 위해 단원고 기억교실을 방문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교실에서 발견한, 청소를 위해 널어놓은 잘 마른 손걸레와 그 아래의 종이학. ⓒ 장성열


우리는 '세월호 세대'다

세월호 참사 천 일을 이틀 앞둔 지난 1월 7일에는 생존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슬픈 이야기에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 그 서글픈 이야기를 들으며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으려니 작년 3월의 한 술자리가 생각났다. 16학번 후배와 술을 마시던 자리였는데 막차 직전까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그 후배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서 왜 우느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들, 그러니까 참사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자신과 동갑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너무 무섭고 슬프다고 이야기했다. 또 학내 독립언론에 있을 때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안산에 있는 분향소와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함께 취재를 했던 (피해자들과 동갑인) 동료 기자들 또한 "자신과 동갑인 피해자가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더 크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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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 2016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 추모제 참가자가 우비를 입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장성열


물론 단원고등학교 재학생이던 희생자들을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학생이었을 '친구'들"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고 불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와는 별개로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세대'라는 것이 생겨났고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세대'라는 것은 몇 살부터 몇 살까지라는 식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단원고 희생자들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슷한 학교생활이나 문화생활, 기억 등을 공유했거나 공유하는 이들을 주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 외에도 폭넓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결코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인데,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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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7일, 촛불이 가득한 광화문 광장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1월 7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시민들이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고 추모제에 참여하고 있다. ⓒ 장성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천 일이 지나도록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국가와 정부는 '선주인 유병언이 사망했으니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맥빠지는 주장만 내놓았고, 자신들이 '왜' 국민들을 구조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그 문제 많은 배의 과적을 눈감았는지, 더 나아가 '왜' 사람들이 죽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해명하지 않았다.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함께 기억하는 이들의 화인에 대못을 박고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천 일 동안의 어둠과 고통을 견뎠고, 얼마 안 가 빛이 올 것이라 믿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지난 12월 25일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일 중 하나인 성탄절이었고, 참사의 3주기인 4월 16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성스럽게 태어나 죽임을 당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해 승천한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죽음과 슬픔만을 극복하지 않을 이다. 그는 모든 양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내려왔고, 죽었고, 부활했고, 승천한 이이기 때문이다. 천일을 앞두고 태어난 예수는 4월 16일에, 혼자가 아닌 삼백 네 명과 함께 부활할 것이다.
#세월호 #1000일 #촛불 #민주주의 #세월호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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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기억하는 정치학도, 사진가. 아나키즘과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자리(Frontier) 라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 사진가 팀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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