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72년 체제'를 만든 사건들
김당
장덕진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에 따르면, 72년 체제는 "정치적으로는 유신,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정책, 조세 및 복지정책에서는 소득세와 기업 부담을 줄이고 간접세에 의존하는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도입된 해"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도 유신체제라는 용어는 사용하지만, 장 교수의 말처럼 72년체제는 학문적 시민권을 얻은 적이 없다. 72년 체제는 오히려 국제정치에서 일-중 또는 중-일 관계를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일-중 관계에서 72년 체제는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2. 21)에 이은 다나카 일본 총리의 중국 방문(9. 25)으로 전격적인 일-중국교정상화(9. 29)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70년대 초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에 맡긴다'는 닉슨 독트린과 함께 찾아온 데탕트는 주한미군 철수론과 함께 한반도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때 국제정세 변화의 흐름을 읽은 중국은 대만을 축출하고 UN에 가입한 이후 개혁개방으로 선회한다. 일본은 미-중 관계가 곧 정상화될 것임을 알고 재빠르게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남북한도 해빙의 흐름을 타고 분단 27년만에 남북 직접 대화로 7.4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는 '국내용'이었음이 머지 않아 드러났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궁정동 안가에 '풍년사업'(10월유신) 팀을 가동한 것은 7.4공동성명보다 두 달 앞선 5월 중순께였다. 북한 역시 그해 4월에 김일성에게 이중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4.15를 '민족적 대명절'로 제정해 탄생 60주년기념 행사를 개최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그해 10월 17일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11. 21)해 유신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실상 종신 대통령제의 시작이었다. 김일성 역시 비슷한 시기에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12. 25~28일)를 개최해 새 헌법을 공포하고, 주석제를 신설해 국가주석에 올랐다.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로, 남한은 종신 대통령제로 독재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데탕트와 국민의 통일 염원을 악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데탕트라는 국제정세 변화의 흐름을 읽고 치밀한 외교전략으로 자강의 길을 가는 동안, 남북한의 위정자들은 국가의 백년대계보다는 정권을 강화하는 데 급급했다. 그들의 권력의지는 남북간의 적대적 공생-의존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동했다. 북한체제는 경쟁자에 대한 숙청과 술타니즘(Sultanism)을 통해 김일성 우상화를 강화했고, 남한체제는 북한 위협을 전제로 '불순세력'에 대한 탄압을 합리화했다. 이처럼 일-중관계의 72년 체제와 남북한의 72년 체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87년 체제가 72년 체제에 갇혀 있을 가능성장 교수가 '72년 체제'를 생각한 배경은 흔히들 거론하는 87년 체제가 실제로는 72년체제에 갇혀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지난해 <경향신문>에 "87년 체제라는 틀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면서 자신이 72년 체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이렇게 썼다.
"민주화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한국인들 중에서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가치를 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성장제일주의와 황금만능주의는 왜 사라지기는커녕 갈수록 두드러지는가. OECD에서 압도적 1위인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에도 불구하고 고령유권자의 정치적 충성도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복지로 고통받으면서도 복지를 늘리자고 하면 반대가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87년 체제가 72년 체제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다. 사람들은 87년 체제를 이야기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른바 386세대들의 열망과 성취만을 담은 역사 해석이고, 1979년 박정희 개인의 사망으로 72년체제가 끝난 것처럼 보인 것이 착시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이다.
"1979년 박정희라는 개인의 사망과 더불어 이 체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만약 착시였다면, 그러한 착시를 더욱 부추겼던 것은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72년 체제가 하나의 제도가 되지 못하고 박정희라는 개인의 영웅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망하자 72년 체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하나는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독재자의 드라마틱한 등장이었다. 그는 광주라는 무대를 통해 선명한 혈흔을 묻힌 채 등장했고, 그것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72년 체제가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변주되고 내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박근혜 탄핵을 지지하는 가운데서도 탄핵에 반대하는 자칭' 애국보수 세력'이 태극기와 함께 미국 성조기를 들고 나서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젊었을 때 박정희의 자주국방에 박수를 쳤던 이들이 나이 들어 노무현의 전시작통권환수는 기를 쓰고 반대하고 사드(THAAD) 배치는 찬성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재심 무죄사건 100건 중 대다수가 72년 체제의 산물72년 체제가 내세운 핵심 가치는 '반공'과 '안보'였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 유신헌법을 선포할 때도, 중화학공업정책을 통한 자주국방을 강조할 때도, 방위세(직접세)를 신설하고 부가가치세(간접세)를 도입할 때도 안보가 우선이었다. 72년 체제 안에서 국가안보는곧 정권안보였다.
그러나 72년 체제 안에서 간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40년 뒤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무죄확정 재심 사건만 100건에 이른다. 그중 상당수는 72년 체제 안에서 안보를 팔아 조작된 사건이다. 이처럼 김기춘이 기초한 유신헌법과 비상대권(긴급조치권)은 이미 역사적 심판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사법적으로도 악법이었음이 증명되었다.
72년 체제에서 조작된 간첩 가운데 일부는 유죄판결 당시 사형을 당했거나, 옥사를 했거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일부는 감시와 냉대 속에서 간첩의 자식 또는 부모로 야만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72년 체제를 담당했던 박정희 정부가 '나쁜 정부'였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은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가배상금관련 통계자료를 보면, 박정희 정부가 역대 정부 가운데서 공권력의 불법행위를 남발한 가장 '나쁜 정부'였음을 알 수 있다(관련기사는 다음 편에 이어짐).
국가예산과 국민세금을 동원한 배제와 차별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반(反)한다. 반헌법이다. 박근혜의 오늘은 '박정희 신화와 그 후광'을 빼놓고 설명이 안 된다. 김기춘은 '대를 이은 나쁜 정권 충성하기'의 표상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와 김기춘은 '우리 안의 박정희'가 키운 괴물일지도 모른다. 79년 10월 김재규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 안의 72년 체제'를 죽이기 위해 '우리안의 박정희'가 키운 박근혜와 김기춘의 목을 비틀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다음 편에는 국정원의 대외비 자료를 근거로 박정희 정부가 얼마나나쁜 정부였는지를 보여주는 신김기춘뎐 마지막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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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김기춘, '우리 안의 박정희'가 키운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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