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김윤주
샤를 보들레르는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François Baudelaire, 1759-1827)는 환속한 사제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였다. 환갑의 나이에 서른넷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 보들레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뜬다. 어머니 카롤린느 드파이(Caroline Defayes, 1793-1871)는 2년 후 오픽(Jacques Aupik, 1789-1857) 장군과 재혼을 한다.
생부가 남긴 유산을 만 스물한 살에 물려받은 보들레르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거리의 여인 잔느 뒤발을 만나 평생의 연인이 된다. 아들의 생활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법원으로부터 '금치산선고'를 받아낸다. 매독과 실어증과 마비로 마흔여섯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의 생활비를 받아 써야 했으며, 스물 몇 차례나 이사를 하며 도시의 셋집을 전전하는 고단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파리는 제2제정기 나폴레옹 3세 통치하에 있었으며, 오스만(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의 도시 개조 사업으로 나날이 새롭게 변모해 가고 있었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화려한 외면과 그 뒤에 가려진 음울한 풍경을 구석구석 '산보자(flâneur)'의 눈으로 탐색하며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적인 시어들을 쏟아낸다. 도시의 향락과 타락, 인간의 천박한 욕망에 대한 환멸을 끊임없이 독설로 쏟아 부으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그 안에서 신음한다. '파리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유다.
첫 시집이자 생전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이 출간된 것은 1857년 6월이다. 같은 해에 동갑내기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의 <보바리 부인>도 출간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재판에 붙여지는 초유의 사건을 겪는다. 무죄 판결을 받은 <보바리 부인>과 달리 <악의 꽃>은 유죄 선고를 받는다. "추잡하고 부도덕한 구절과 표현"을 담고 있고, "공중의 도덕과 미풍양속을 침해"했다는 것이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