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정원스님의 빈소가 마련됐다. 스님은 지난 7일 오후 촛불집회가 끝난뒤 광화문광장에서 분신해 9일 숨졌다.
연합뉴스
정원스님 입적을 애도하며.
스님!
스스로 이승의 모든 인연을 초기화 하시고 지수화풍 우주의 원소로 회귀하신 정원스님. 부디 육도윤회의 사슬을 끊고 생사의 고통 없는 세상에 왕생하소서. 우리 곁에 가난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투셨던 부처님. 우리 곁에 스님의 모습으로 왔던 부처님. 스님의 안타까운 열반소식에 온 마음으로 애도하고 통곡합니다. 부처님을 여읜 아난다의 비통이 이러할까 짐작하는 건 불손한 비유겠지요. 그러나 사바세계에 남겨진 중생은 슬픔을 가눌 길 없습니다.
스님은 극도의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의 육신을 다비함으로써 불의한 권력을 성토하고 민중의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스님의 분신을 두고 사회관계망에서는 소신공양이니 숭고한 희생이니 하는 종교적 수사로 치장하기 급급하더군요. 스님이 미리 경계하셨던, 스님의 죽음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도 스님의 분신행위를 종교적 극단으로 국한하려는 움직임도 공공연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내란사범을 체포하라. 18 대선 부정을 규명하라.' 스님은 분신을 결행하는 목적을 명확하게 천명하셨습니다. '일체 민중들이 행복한 그날까지 나의 발원은 끝이 없사오며 세세생생 보살도를 떠나지 않게 하소서.' 분신에 임하는 서원을 발원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미리 적시하신 유훈을 존중하여 이제는 스님의 열반의 의미를 왜곡, 축소, 확대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멈춰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염원하시고 대선부정 수사를 촉구하시고 위안부 합의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무효화를 주장하시고 세월호의 진실규명을 끊임없이 요구하셨지요. 죽음에 임하는 그 순간까지도 스님은 촛불의 승리를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스님. 스님의 족적을 쫓다보니 스님의 그런 투쟁의 과정이 곧 치열한 구도의 행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불제자의 한사람으로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스님. 저는 나태하고 이기적인 중생이었습니다. 스님이 사회정의와 불국정토의 실현을 위해 끊임 없이 투쟁하고 싸워나갈 때 동시대의 민중이자 불제자인 저의 삶은 어떤 것 이었나 처절하게 뉘우치고 반성합니다. 꾸준히 투쟁현장을 지키신 스님께서는 끝내 분신의 고통까지 자처하시다니 이렇게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 어찌 가능했을까요. 스님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부끄러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형벌인지 미안함이 얼마나 커다란 동력인지 깨달아갑니다.
스님. 저는 여태까지 저의 종교적 무능과 이기심의 원인을 항상 이 사회 수행자들의 위선과 독선에 실망하고 회의한 탓으로 변명하기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부처님도 일찍이 열반에 앞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부처님 말씀을 등불삼아라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런 부처님의 유훈을 숙지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이 돈독하지 못한 원인을 외부의 요인으로 전가하는 것은 부끄러운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그러나 상좌부 계층의 부조리와 모순은 분명 개인의 신앙을 무력화시키고 신심을 약화시키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인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제 눈에 비친 수행자들은 중생의 고통은 외면한 채 금란가사에 둘러싸여 황금법좌 위에 군림하는 제왕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생들의 불안과 고통을 볼모로 하여 무분별한 감성 팔이, 기복 팔이로 중생들의 이성을 마비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사악한 대중추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부처님 말씀 어디에도 그들의 횡포를 용납할만한, 대중의 굴종과 나약함을 부추기고 조장하기 합당한 경구 한구절도 목도하지 못했던 저는 수행자들의 그런 전횡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불자로서의 신행에서 멀어지고 점점 개인적 안락함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불교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며 겪었던 갈등과 혼란의 경험은 저를 더욱 개인주의적인 이기주의자로 안주하게 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공동체의 운명에 무관심한 채 개인적 안락에 치중한 삶은 우리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결국 공동체의 운명과 무관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을 더욱 크게 위협한다는 사실을 스님의 충격적인 열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신앙에 냉담했던 불교신자로서 종교적 회의와 환멸을 극복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낯설고 신심은 더디게 차오릅니다. 그러나 스님의 열반의 의의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이 과정은 무척 소중하고 의미 있는 절차일 것입니다.
스님이 감행하신 열반의 의미를 자신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자자와 포살의 계기로 삼고자합니다. 제가 요즘 며칠 찾아 읽고 접한 스님의 삶은 수행자의 몸을 빌어 나투신 부처님의 존재를 느끼는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목격한 스님의 행적은 주로 투쟁과 시위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싸우시고 중생과 아픔을 함께 하시며 나아가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무명을 타파하고 광명세상을 밝히는데 골몰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전에 등장하는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중생의 제도에 치열하게 실천하는 불보살들의 일대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원스님은 이 세상에 한 수행자의 몸으로 현현하신 불보살의 화신이요 부처님이셨습니다.
스님은 열반에 드셨지만 스님께서 남기신 불보살의 향기는 온 우주에 충만합니다. 스님. 어리석은 중생은 스님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편으로 일깨우고서야 비로소 많은 것을 깨달아 갑니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시고 세월호의 진실을 요구하고 대선 부정 수사를 촉구하는 일인시위를 이어나가실 때 그땐 스님의 존재를, 우리 곁에 왔던 부처님의 향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믿고 의지할 수행자는 없다 한탄하던 것도 그런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일부 스님들은 대개 자신의 소승적 구도에 심취하여 중생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방관했습니다. 또 일부 스님들은 상구보리 하와중생의 기치 아래 저자거리로 내려오셨지만 이내 중생을 호도하고 기망하는 대중추수주의자로 전락했습니다. 화려한 언변과 교언영색으로 이름을 떨친 수행자들은 중생들의 고통과 불안을 빌미삼아 시물을 챙기고 유명세를 누리는 악덕 종교권력자들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토굴의 우상에 사로잡힌 소승과 권세와 치부에 깊숙이 젖어버린 대승 양극단 어디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귀의처는 되지 못했습니다.
스님.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던 유마힐의 측은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기 수행자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강연장에서, 스튜디오에서 육사외도의 사교술로 대중을 기망, 호도할 때 대중은 극악한 통치자와 부역자들 그리고 악덕재벌의 횡포에 착취당하고 죽어갔습니다. 신심 미약한 보살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우울증적인 개인사를 상담해준 대가로 유명세와 종교권력을 거머쥔 유명 수행자들은 정작 중생들의 고통과 현실은 외면했습니다.
일부 보살들의 팬덤 열기와 맹목적인 신앙을 사유화 하여 사조직 신행단체를 거느리며 교주처럼 군림하느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신음하는 중생들의 고통에 귀 기울일 수 없었던 거지요. 불제자인 제 눈에 비친 불교계의 그런 작태는 수행자 일반에 대한 환멸과 종교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습니다. 부처님 법에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하라던 부처님의 유훈도 적절한 교시가 되지 못할 만큼 적대적인 종교적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탄에 빠진 중생, 압재에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한 남성의 분신소식이 단신으로 전해졌습니다. 왠지 사람들이 내심 우려하고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는 허탈감과 패배감이 시위와 저항으로 지친 시민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명미상의 50대 남성은 스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님은 각종 시위와 투쟁의 현장에 묵묵히 동참하시던 한 수행자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무척 충격적이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드는 것이 죄책감이었습니다.
스님. 스님은 우리 곁에 존재했던 유마힐, 지장보살, 마하니마 왕, 부처님이었습니다. 스님은 여러 불보살과 성현들의 화신이었습니다. 스님은 토굴대신 광화문 광장에 방부를 튼 구도자였습니다. 스님은 주문대신 일인시위 팻말을 들고 설법대신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제 스님은 열반에 드셨지만 여전히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든 수십만 민중의 모습으로 함께 하십니다. 수많은 정원스님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운집합니다.
스님께서는 극단적 분신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일깨우는 방편을 삼고자 하셨습니다. 스님을 향한 가장 치열한 애도는 스님의 말씀을 서원으로 새기고 실천하는 일이겠지요. 대선부정을 밝히고 박근혜를 구속하고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고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을 무효화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싸워나가겠습니다. 정원스님의 열반으로 얻게 된 값진 깨달음이 퇴색되지 않게 사부대중이 연대하고 동참하겠습니다. 불자로서 게을렀던 죄를 참회합니다. 스님의 광장에서의 구도행각에 귀의합니다. 스님의 염원을 등불삼아 정진할 것을 서원합니다.
우리 곁에 오셨던 정원스님. 민중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겠노라는 염원에서 지옥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는 순간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던 지장보살의 대자비심을 봅니다. 위안부, 노동자, 세월호 유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던 유마힐의 동체대비심을 봅니다.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하고자 스스로 불속에 뛰어든 스님의 결연한 의지에서 백성의 목숨을 한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어 나무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묶고 익사한 카필라국 마하니마 왕의 숭고한 희생을 봅니다.
수행자의 신분으로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활약하셨던 스님의 진심에서 고국 카필라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침략국 유리왕에게 세 번이나 애원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량을 봅니다. 스님이 보이신 삶과 죽음의 일대기는 그대로 우리가 경전으로 배우고 감화 받았던 보살도의 행원이자 부처님의 전생담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아! 스님. 스님께서 광장의 땡볕과 비바람 속에서 일인시위를 이어가실 때 그때 스님에게도 고국의 나무는 포근한 그늘을 내어주던가요.
스님. 무릇 속세와 인연을 끊은 출가수행자는 세상일에 무관심한 채 토굴의 우상에 안주하라 종용하지 않던가요. 편협한 논리와 수행자의 이기심이 만나 소승적인 은든자의 미덕을 취하는 일은 수행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도 하지요.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그릇된 시선과 편견과도 싸우셔야 했겠지요. 출가자의 몸으로 조국 카필라국의 안위를 끊임없이 걱정하고 인도전역의 평화를 위해 시시콜콜 국가 간 중재에 관여하고 평화를 도모했던 부처님의 전범도 그들에겐 적절한 귀감이 되지 못하겠지요.
더구나 대중의 각성을 두려워하는 지배자들의 은근한 압력은 수행자와 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공공연히 꺼리고 비난하죠. 스님은 수행자 신분으로 교단내외의 오해와 따가운 시선, 온갖 방해에 시달리셨겠지요. 그러나 스님은 수행자의 사회참여로 인해 예상되는 그 모든 장애와 고난을 무릅쓰고 꾸준히 광장을 지키셨습니다.
스님. 촛불민심이 천만을 육박하고 세월호가 천일이 된 시점에도 혁명은 지리멸렬하고 진전이 없습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작은 경종이 되고자 스님은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셨습니다. 스님 이제 촛불은 다시 환하게 오릅니다. 그리고 민중들은 스님께서 분신으로 항거하신 뜻을 염화미소 무언의 경구를 깨치듯 이해하고 가슴에 새깁니다. 스님께서 점화한 촛불은 승리의 그날까지 타오를 것입니다. 동전 두 닢으로 등불을 켰던 가난한 여인 난타의 등불처럼 한 무명의 수행자가 온몸을 바쳐 살려낸 불씨는 승리의 그날까지 강한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스님.
살인귀 앙굴리마라를 굴복시킨 부처님의 지혜와 용기를 빌어 살인정권을 해체하고 반드시 처벌받도록 하겠습니다. 아흔아홉 명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잘라 훈장차람 목에 걸고 다녔다는 살인귀 앙굴리마라. 앙굴리마라가 백 개의 손가락을 채우기 전에 부처님을 만나 굴복하고 참회했듯이 박근혜와 그 세력도 종말이 머지않았음을 극단으로 치닫는 그들의 뻔뻔함과 치졸함을 보며 체감합니다.
앙굴리마라를 대적하는 일보다 304명의 목숨을 한 번에 앗아가고도 더 많은 민중의 고혈을 탐하는 박근혜 최순실 일당을 항복시키는 것이 더 험난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법을 어지럽히는 자 정법의 칼로서 단죄하라던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정원스님. 스님의 안타까운 입적이 민중의 승리로 회향되기를 기원합니다. 스님의 열반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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