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조했지만 넌 그러지 마?... 반기문과 김근태의 악연

[게릴라칼럼] 반기문, 정말 '대한민국의 자랑'인가③

등록 2017.01.16 15:26수정 2017.01.1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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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0일은 반기문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10년간 유엔을 이끌어 온 그가 퇴임을 하루 앞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동안 이룬 성과에 대한 뿌듯함과 해내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했을 것이다. 아울러 모국에 영구 귀국한다는 기쁨과 더불어, 유력 대선주자로서 그가 만들어 나갈 미래에 대한 설렘이 그를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자신에게 쏟아질 냉정한 평가에 대한 '우려'도 밀려왔을 터이다.

수만 가지 생각이 반기문의 머리를 채웠겠으나, 그 날이 어떤 날인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반기문에게 온갖 상념을 안겼을 그날은 김근태의 5번째 기일이었다. 김근태는 민주화 운동으로 잔혹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며 '세계의 양심수'로 불렸고, 반기문은 총장 임기중 전 세계를 향해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성명을 부지런히 발표했었다.

이렇듯 한 사람은 양심수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양심수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두 사람을 잇는 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반기문과 김근태 사이에는 훨씬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정확히는 '악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케네디가의 김근태 면회 요청을 거부한 반기문

 1987년에 한국을 찾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의 방문단. 고 김근태 선생과 아내 인재근 여사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수상했지만, 수감되어 있던 김근태는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1987년에 한국을 찾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의 방문단. 고 김근태 선생과 아내 인재근 여사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수상했지만, 수감되어 있던 김근태는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92년 2월 14일, 로버트 케네디인권센터의 간부들이 서울에 왔다. 일행 속에는 이 단체의 설립자인 고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 캐리 케네디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김근태를 만나고, 정부에 그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잦은 수배와 긴 옥고를 치른 뒤 노태우 정권 초기에 잠시 석방되었다. 하지만 군사독재 청산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자, 1990년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김근태를 다시 감옥에 가뒀다. 그를 만나러 온 케네디 일행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외교부였다. 이들은 양심수 김근태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면회를 신청했다.


이 방문객을 맞은 이는 외교부 미주국장이었던 반기문이었다. 케네디 인권센터는 1987년에 김근태와 그의 아내 인재근에게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주었고, 상을 전달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찾아왔었다. 반기문은 5년 만에 다시 찾은 방문객들에게 "김씨 면회는 현행법상 곤란하다"며 돌려보냈다.

 2002년 2월 15일 <한겨레신문> 2면에 실린 반기문의 면회 거부 기사.
2002년 2월 15일 <한겨레신문> 2면에 실린 반기문의 면회 거부 기사. 한겨레신문

'케네디 인권상'을 받은 양심수를 만나려는 케네디 조카의 면회를 반기문이 거부하는 장면은 매우 아이러니했다. 반기문은 1962년 충주고 3학년 때 국제적십자사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처음 미국을 방문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 방문단을 반갑게 맞았고, 반기문은 그를 만난 뒤 외교관을 꿈꾸게 되었다. 


물론, 김근태의 면회를 거부한 것이 꼭 반기문 개인의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정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을 따름일 터이다. 그렇다면 훗날 반기문이 비민주적 정권을 향해 '양심수 석방'을 외친 행동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나는 양심수를 가두는 데 일조했지만, 당신들은 그러지 마라?

2010년 2월, 미얀마 군부가 아웅산 수치의 석방 신청을 기각하자, 반기문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미얀마의 모든 정치범과 정치적 과정에 참여했던 민주 인사들을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임기를 마치기 직전까지도 예멘을 포함한 각국의 정치범, 사회활동가, 기자 등 양심수를 풀어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이라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비겁하고, 또 편리한가.  

은사들의 양심수 구호활동을 전두환 정권에 보고

반기문이 노태우 정부에 바쳤던 충성심이 얼마나 진실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서슬 퍼런 분위기 속에서 마지못해 한 선택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정권 시절 반기문의 구체적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언론사 데이터 베이스를 검색해도 그 시기의 반기문을 다룬 기사는 거의 없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승진을 거듭했다는 점에서, 그가 권위주의 정권에 협조적이었음은 분명하다. 반기문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전두환이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공항까지 마중인사를 나가곤 했다.

지난해 4월, 80년대의 기밀 외교 문서가 공개되면서, 반기문이 그 시기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여주는 몇 가지 단서가 드러났다. 1985년 반기문이 미국에서 연수를 받던 중, 김대중 관련 정보를 정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전인 1980년,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세력은 시민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있었다. 공안당국은 재야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고, 김대중을 내란혐의로 기소했다. 공안당국은 관련자들을 고문해 진술을 조작한 뒤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판결에 대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과 유엔 인권위원회 등의 국제 단체가 문제를 제기했고, 요한 바오로 2세 등 전세계 지도자들도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도널드 그레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등이 항의해 오자, 미국의 지지가 절실했던 쿠데타 세력은 형집행을 강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뒤 1982년 12월, 김대중은 고문 후유증 등의 치료를 겸해 미국 망명 길에 나선다. 하지만 그는 2년이 조금 지난 1985년 초에 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당연히 미국 정부는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했다. 김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하던 전두환 정권이 그의 귀국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해 2월에는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한 양심수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미국 지식인들은 그의 무사 귀국을 요청하는 서한을 전두환 정부에게 전달하기로 했고, 여기에는 하버드대 교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반기문은 외교부 참사관으로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연수중이었다. 학교 신문이 이 사실을 보도하자, 반기문은 이 사실을 수집해 보고했고, 이는 "김대중 동정"이라는 제목의 문서로 만들어져 전두환 정부에 공식 전달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반기문이 군부에 동정을 보고하던 김대중은 당시 유엔이 석방을 요구하던 양심수였다.

반성 모르는 반기문

2006년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으로 다시 미국에 왔다. 그리고는 세계의 억압적 권력을 향해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이렇듯 과거 속 자신의 반대쪽에 서서 행동하게 된 반기문, 그는 자신의 상반된 모습에서 모순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대중 보고 문건이 공개된 직후, 반기문은 제주도에서 열린 관훈클럽 간담회에 참석했다. 그는 해당 문서에 대한 논란을 "말도 안되는 비판"이자 "흠집내기"라고 일축했다. 자신은 그저 "대학신문에 난 것을 카피해 보냈고, 학생도 아니고 펠로우로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어서 보고한 것"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반기문은 더 나아가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정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을 관찰해 보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비판은커녕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이라는 투였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을 제가 따라다니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 것(언론 보도)을 보면 기가 막힌다"고도 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의 수상자 명단에 소개되어 있는 김근태와 그의 아내 인재근.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의 수상자 명단에 소개되어 있는 김근태와 그의 아내 인재근.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

반기문이 미국 대학에서 국비로 연수를 받으며 '김대중 무사귀국 운동' 동향을 보고하던 1985년은 김근태가 구속된 해이기도 하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다가 체포된 그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수십 일간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 '관절뽑기' 등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이후 복권되어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평생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2011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지난 1월 14일은 박종철 열사의 30번째 기일이었다. 이날 반기문은 열렬한 환영 속에서 자신의 고향 음성으로 '금의환향'했다. 두 사람의 삶이 교차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서슬퍼런 독재권력과 맞서 싸우던 21세 청년 박종철이 구타와 고문 속에 스러진 1987년, 반기문은 그해 주미대사관 총영사로 영전했다.

반기문은 지난 12일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공항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 그리고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런 뒤 다시 한 번 "제 한 몸을 불사를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김근태와 박종철의 기일을 앞뒤에 둔 그 날, 반기문은 자신이 어떤 희생을 해 왔다고 믿은 것일까.
#반기문 #전두환 #노태우 #김근태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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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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