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기호들
김윤주
파리의 지명에 무심히 들어 있는 숫자들은 파리 사람이 아닌 이에겐 퍽이나 이국적이라서 자꾸만 입으로 말하거나 글자로 쓰고 싶게 만든다. '파리 8구에서 만난 까만 스웨터의 그 남자'랄지, '파리7대학 카페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라든지, '메트로 6과 12가 만나는 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그 악사'라든지 하는 식이다. 거리를 걷다 길모퉁이에서 '5e Arrt'라고 쓰여진 표지판을 만난다거나, 지하철 개찰구에서 작은 동그라미 속에 쓰여진 'M13'을 마주칠 때면 문득문득 '아, 맞아! 내가 지금 파리에 있는 거잖아!' 생각하며 새삼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심지어 파리의 주소 체계를 알고 난 뒤엔, 서울에서 예약한 파리의 호텔 주소 끝에 '75014'라고 붙어 있는 우편번호를 보면서, '75'에서 이미 에펠탑과 센 강을 떠올리고, 끝자리 '14'를 보면서, '흠, 호텔이 14구에 있단 말이지'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이쯤 되면 이미 마음은 바다 건너 저 멀리 센 강의 좌안, 파리 남쪽 14구 골목길 어디쯤으로 날아가 버리고, 머릿속엔 하루 종일 에디뜨 피아프(Edith Piaf, 1915-1963)나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의 샹송이 맴돌아 일하는 내내 흥얼거리게 된다. 어느새 파리의 차가운 가을 밤공기가 코끝에 와 닿는 느낌이 들고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들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건물의 층수를 표기하는 방법도 '이국적'이다. 지상층을 1층으로 시작해 한 층 올라가면 2층, 3층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와 달리, 이 사람들은 지상층은 0층이고, 한 개 층만큼 올라가면 그때부터 1층, 2층, 3층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어색하고 지루한 시간을 때우며 버튼 옆에 층수를 표기한 숫자를 보고 있자면, 인간의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 언어가 세계관을 결정하는가 해묵은 주제가 절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