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파주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이원수가 단순히 시험을 못 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사임당의 다음 언급에서 드러난다. 사임당은 "공자님은 아내를 버리지 않았어요"라면서 "전란을 만나 아내와 떨어져 산 것뿐이죠"라고 대꾸했다. 이원수는 책을 꼼꼼히 읽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의 생애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입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원수는 지는 게 싫었다. 아내한테 지는 것은 특히 그랬던 모양이다. 공자의 이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틀리다는 지적을 받자, 이번에는 공자를 계승한 증자를 거론하면서 "그렇다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요?"라고 쏘아붙였다. 증자도 이혼했으니 자기도 증자처럼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갈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사임당은 "증자가 아내를 버린 것은 아내가 시부모 봉양을 못했기 때문이죠"라면서 "그러나 증자도 새장가를 가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임당이 죽은 뒤의 재혼 문제를 둘러싼 부부간 대화는, 이렇게 서서히 이원수의 짧은 지식을 드러내는 논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원수에게 사임당은 '너무 부담스러운 부인'이원수는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우고 공자·맹자·증자·주자를 입에 달고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경기도 파주의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 사람이 유교 성현들에 대해 이처럼 얕은 지식을 잔뜩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거리낌 없이 술술 내뱉고 살았다. 그랬으니 신사임당이 속으로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된다. 공자·맹자에 관한 정보가 엉터리라는 게 드러났는데도, 이원수는 굽힐 줄 몰랐다. 급기야 그는 주자의 이름까지 거론한다. "주자의 집안에서도 이혼하고 새장가든 일이 있지 않소?"라며 반격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원수는 강타를 맞았다. "주자는 47세 때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그러고는 새장가를 들지 않았습니다."
훗날 율곡 이이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지은 글이 있다. <선비 행장>이란 글이다. 선비(先妣)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높임말이다. 그래서 <선비 행장>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대기>다.
이 글에 묘사된 이원수는, 뜻은 크지만 집안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대한 것을 말하고 큰소리를 치기는 하지만, 현실적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사임당은 예술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자녀교육과 집안일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성격적으로 정반대였다.
부부의 성격이 정반대여도 조화가 잘 이루어지면 시너지 효과가 생기겠지만, 이 부부의 경우에는 그 조화란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원수 입장에서, 사임당은 너무 부담스러운 부인이었다. 아내로 대하기에 벅찬 상대였다. 그래서 이원수가 사임당을 심리적으로 기피했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성격도 정반대이고 조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두 사람이 좋은 부부가 될 리도 만무하고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질 리도 만무했다. 그래서 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양처가 되기도 힘들었다. 사임당은 양처가 되고 싶었겠지만, 이원수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데릴사위를 원했던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요즘처럼 연애결혼을 하는 세상이었다면, 애당초 두 사람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임당이 처음부터 이원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수 있고, 이원수도 처음부터 사임당에게 접근할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다.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속의 이원수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사임당에게 어떻게든 접근해 보려고 애쓰지만, 실제의 이원수가 동일한 상황에 처했다면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