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승동교회 청년회장 김원벽과 차상진 목사.
교회내 안내 게시판 촬영.
당시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이라 불리는 어른들보다 더 큰 용기를 내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년 3.1일 토요일 민족대표와 학생대표들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종로 탑골공원(당시엔 파고다 공원)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33명이 아닌 29명만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인근 서양식 요리집이었던 태화관(現 태화빌딩, 인사동 194-27)에 모인다. 이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수를 했고, 전화를 받고 온 일본 헌병과 순사들에 연행되어 경무 총감부로 들어갔다.
이일은 어떤 징조였을까. 민족대표 대부분은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선다.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여든 군중에게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마침내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다.
학생들에 의해 불처럼 번진 3.1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 이어 중소도시와 농촌까지 확산된다. 3.1독립운동은 일제에 의해 총 7500여명이나 죽고 체포된 사람만 4만 5천여 명이나 되는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엔 계몽운동, 무장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 한일강제병합의 해인 1910부터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를 했던 일제는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1919-1930)로 식민지 정책을 바꾼다.
또한 승동교회에서는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강점기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민족의 아픈 역사 속 특별한 의미 때문인지 여느 교회당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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