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1919년 3월, 우리 국민이 열심히 싸운 이유
1919년 3월에 유관순을 포함한 우리 국민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열심히 싸운 것은 식민지배자 일본의 지배가 외세의 지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우리 국민의 재산권을 빼앗았다. 또 한국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한국의 자원을 강탈했다. 이 과정을 통해 대다수 한국인들을 개·돼지처럼 취급하는 동시에, 일본인과 친일파한테만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 대다수 한국인들을 위한 땅이 아니라, 소수의 일본인 및 친일파를 위한 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1910년 당시만 해도 조선왕조의 멸망에 대해 덤덤한 반응을 보였던 일반 국민들이 1919년에 그렇게 극렬하게 저항한 것은, 일본의 처사가 너무도 부당하고 불법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수의 한국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기마 헌병대의 총칼에 달려들며 만세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3월 1일 그날, 서울 탑골공원과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에 연희전문학교 2학년 정석해가 있었다. 해방 뒤에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60년 4·19 혁명 때 교수단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정석해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광화문 앞에서는 '독립 만세'라는 구호와 더불어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도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우리의 발걸음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이 지축을 진동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날 우리 국민들이 외친 '왜놈 물러가라'란 구호는 다른 말로 하면 '왜놈 하야하라', '왜놈 퇴진하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국민들이 조선 총독과 일본 지배자들의 하야 및 퇴진을 외친 것은, 그 지배의 본질이 우리 국민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 가을부터 우리 국민들이 하야와 퇴진을 외친 것과 비슷한 동기로, 1919년의 유관순과 우리 국민들도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쳐댔던 것이다.
지난해 연말 이래, 촛불의 열기에 당황한 친박 세력은 촛불 집회장 근처에서 집회를 여는 한편, 촛불집회를 헐뜯는 데 여념이 없다. 그들은 말로는 박근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그렇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
유관순과 만세 시위대를 바라보는 1919년 당시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금의 친박세력처럼 그때의 친일 세력도 시위대를 향해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왜놈 퇴진', '왜놈 하야'를 외치는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망치는 세력'이라고 험담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대표주자가 바로 이완용이었다. 1905년에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더니 1910년에는 조선의 국권마저 일본에 팔아넘긴 그는, 1919년에는 3·1운동을 탄압하는 데도 남한테 뒤질세라 앞장섰다.
매일 같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만세 시위는 3월 1일 제1차, 3월 2일 제2차로 시작해서 3월 31일에 제31차를 기록하더니, 4월에 들어선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자 겁이 난 이완용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여러 차례 글을 실었다. 시위 열기를 가라앉힐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