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담그기 체험을 하고 있는 서울시민"장하다 내인생 프로젝트"에 참여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서울혁신파크 미래청 앞에서 장 담그기 체험을 하였다.
엄관용
맛은 기억입니다. 대규모 공장에서 생산된 된장과 간장에 익숙한 맛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그 만큼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듭니다.
길들여진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시민들의 먹거리 기본권도 중요하지만, 맛에 대한 기억이 모두 동일해지고 있는 우리 식생활 방식이 저에게는 더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우리 가족만의 장맛을 보기 위해 1년을 기다리고, 풍미 있는 맛을 찾고자 1∼2년을 추가로 더 기다려야 하는 숙성의 시간을 당연히 감수했던 이전 세대의 삶이 훨씬 더 다채로웠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우리 사회 전체가 맛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대도시 서울의 작은 공간에서 200여 명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어우러져 마음을 이어 담가 낸 장독들이 우리 어머니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장맛을 뽐내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같은 콩이라도 손이 따뜻한 사람이 반죽한 메주와 차가운 사람이 반죽한 메주가 다른 맛을 만들어 내고, 장을 담고 가르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 장독과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까지도 각자 다른 장맛을 숙성시킬 것입니다.
고은정 대표의 말씀처럼 발효는 변화입니다. 결국 된장과 간장이 만들어지지만, 그 색깔과 풍미는 수천 가지의 변화 과정을 거쳐 우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장독대가 마련된 서울혁신파크에 모여 있는 혁신가들 역시 "상상이 현실과 만나는 수천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자신들의 꿈을 발효시키고자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혁신파크는 협력을 통해 도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혁신 플랫폼입니다. 모여 있는 단체와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사회혁신이 일어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서울혁신파크에 둥지를 틀고 파크살이를 시작한 50여 개의 장독은 파크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닮아 있습니다.
자신의 맛을 찾아나가는 발효 과정을 기다리는 것처럼 서울혁신파크에서 시도되고 있는 사회혁신의 실험도 충분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11월 완성된 장맛을 볼 즈음에 서울혁신파크도 좀 더 숙성된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