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작가가 목숨 걸고 쓴 소설집

[서평] 북한 작가 '반디' 소설집 <고발>

등록 2017.03.07 08:09수정 2017.03.07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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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본(북한의 149호 조치에 의해 적대군중,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분류되었음이 기재된 가족의 서류, 그 사본-기자말)을 쥔 손으로 나도 모르게 내 아랫배를 더듬었다. 거기서는 지금 결혼 후 뒤늦게이긴 하지만 새 생명이 움터 자라고 있었다. 부끄러워 아직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 다행 중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생명을 낳을 때 그 생명이 복되기를 바라서이지 한뉘를 가시밭을 헤쳐야 할 생명임을 안다면 그런 생명을 낳을 어머니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만약 그런 어머니가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죄인 중에도 가장 잔악한 죄인이 될 것이다! 오늘내일 중으로 꼭 산부인과에 가야겠다.(<탈북기>, 아내의 일기 중에서. 40~41쪽)

단편소설집 <고발>(다산책방 펴냄), 첫 번째 이야기인 <탈북기>는 남편의 당원 입당을 위해 부문당위원에게 성폭행 위기에 처한 한 여자의 절박한 몸부림을 통해 북한을 고발하는 소설입니다.


대물림되는 반동분자 출신 성분인 남편의 아이. 소파수술(임신중절) 후 남편 몰래 숨겨놓고 먹던 피임약을 우연히 발견한 화자인 나, 일철이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인데요. 출신 성분이 나쁘면 당원이 되지 못하고, 그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본 권리까지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만 하는 북한의 혹독하고 잔인한 현실에 착잡해졌습니다.

 <고발> 책표지.
<고발> 책표지.다산책방
<고발>에 수록된 소설은 7편. 북한 사회를 최대한, 그리고 제대로 알리고자 의도한 것처럼 주제와 소설 배경과 주인공들의 처지가 다양한데요. <유령의 도시>, <지척만리>, <무대> 등 나머지 소설들도 쉽게 읽히지 않더군요.

평양 시내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자지러지게 우는 소설<유령의 도시>를 읽을 때는 <크로싱>(차인표, 신명철 주연. 2008년 개봉)이란 영화에서 본 강제수용소 풍경과 꽃제비의 처참한 몰골이 떠올라 한참 동안 착잡해졌고, 무얼 할 수조차 없이 심란하기까지 했습니다.

<고발>을 통해 알게 된 북한의 현실이 누군가의 상상이 더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북한에 실제로 살고 있는 한 북한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자신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들을 소설화 한 것이라 더욱 착잡하게 와 닿았나 봅니다. 북한의 참혹한 현실, 그 생생한 증언이니까요.

저자 '반디'는 1950년생으로 현재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 작가입니다. 20대인 1970년도부터 북한 잡지에 글이 실릴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동안 많은 작품들이 작가동맹기관지에 실릴 정도로 북한 사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라고 하네요.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점에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으로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먹고 살기 위해 고향땅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북한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됩니다.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문제점, 출신성분으로 구분되는 인류 최악의 연좌제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의 대변자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한 반디는, 북한 주민들이 실제 겪고 있는 고통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픈 사연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두었습니다. 각종 사연들이 담긴 소문들과 실제 벌어졌던 사실들을 기초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작품들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 269~270쪽


반디. 그는 북한의 현실을 알리겠다는 신념만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목숨을 건 집필을 해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 먼 철의 장막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때가 오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이런 그에게 어느 날, 평소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눴던 친척 중 한 사람이 "중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털어 놓게 됩니다. 처자식이 있는 자신이 움직이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탈북을 포기, 그 친척을 통해 반출할 것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리하여 그동안 집안 깊숙이 숨겨뒀던 원고를 그 친척에게 건네게 되는데요. '자신도 북한을 빠져나간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어서'의 이유로 거절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결국 그 친척이 보낸 브로커를 통해 그의 원고가 반출되어 우리나라로 오게 되는 사연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고발>은 2016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일본에서 출간되는 것을 시작으로 '3월 초에 미국을 비롯한 영국, 대만 등 20개국에서 출간 예정(프로필 참고)'이라는데요. 북한에 현존하는 작가가 썼다는 것. 특수한 사연과 경로로 나온 책이라는 것. 북한의 현실을 그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들려준다는 것, 게다가 작품성까지 뛰어나 이미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반정부 활동을 이유로 포로수용소에 8년 동안 감금되었던 경험을 계기로, 자신의 경험과 소련의 수용소 역사와 그 실상 등을 <수용소 군도>라는 작품에 담아 세상에 알린 소련의 저항 작가인 솔제니친(1918~2008)에 비견, '북한의 솔제니친'으로 불리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진실한 생활이란 자유로운 곳에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억압,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이구요. 얼마나 처참해요. 지금 저 조의장에선 벌써 석 달째나 배급을 못 타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꽃을 꺾으려고 헤매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그들의 눈물이 진실이란 말입니까. 예? 백성들을 이렇게 지어낸 눈물까지 흘릴 줄 아는 명배우들로 만들어버린 이 현실이 무섭지도 않은가 말입니다." - 209쪽.

김일성 사망 당시 조의 정도에 따라 삶이 갈리기도 해 독사에 물리거나 산사태에 목숨을 잃기까지 하면서 꽃을 구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조의해야만 했던 북한을 고발하는 여섯 번째 소설 <무대>의 일부분입니다.

권총까지 차고 다니며 여차하면 총으로 제압할 수 있는 권위와 힘을 가진 보위부원인 아버지에게 그 아들은 이렇게 대드는 데요.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과 이념, 충성을 강요하며 권총을 겨누기까지 합니다.

<지척만리>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여러 차례 받고도 여행증을 발급받지 못해 어머니의 임종을 끝내 지키지 못한 한 남자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기르고 있던 고향새인 종달새 한 쌍이 다시 돌아오지 말기를, 그리하여 자유를 빼앗기지 말기를 바라며 조롱을 찢어버립니다.

"길들었구나!…. 불쌍한 것들!…. 그래, 나 역시 지척도 천리 밖으로 살아야 하는 조롱 속의 짐승인가 보다! 조롱 속의 짐승!" - 144쪽

그러면서 이처럼 독백하는데, 앞서 인용한 보위부원 아들의 말과 함께 저자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목숨을 걸고서라도 북한의 실상을 세상에 반드시 알려야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절실하게 느껴진 부분이라 소개합니다.

정확하게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저자 '반디'는 '반딧불이'의 그 반디라고요. 어둠이 짙고 깊을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희망을 상징하기도 하는. 북한의 실상을 그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들려주는 이 책이 북한에 드리운 깊고 잔인한 어둠을 걷어내는 계기의 책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반디, 그의 건안을 소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제 마음도 더합니다.
덧붙이는 글 <고발>(반디 씀) | 다산책방 | 2017-02-15 (초판출간 2014년)ㅣ 정가 13,800원

고발

반디 지음,
조갑제닷컴, 2014


#고발 #반디(반딧불이) #탈북기 #북한의 솔제니친 #다산책방(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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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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