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을 만날 수 있는 우암사적공원

등록 2017.03.05 13:53수정 2017.03.0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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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전 출장길에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는 우암사적공원을 다녀왔다. 대전역 앞에서 311번 시내버스를 타면, 대략 25분이면 우암사적공원에 도착한다.

우암사적공원은 조선시대 학자였던 우암 송시열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대전광역시에서 조성한 공원이다. 우암사적공원에 들어서면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은 송자대전판(대전시 유형문화재 제1호)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송자대전판은 우암 송시열의 문집과 연보를 모아서 만든 판목이다. 송자대전은 우암 송시열이 집필한 문헌을 정리해서 만든 책이다. 우암 송시열을 높혀 볼러서 공자, 맹자, 주자처럼 우암 송시열을 송자라고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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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사적공원 남산정사 ⓒ 여경수


우암사적공원에서 가장 볼 만한 건물은 남간정사(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학문을 익히던 곳이다. 남간정사는 정면이 아닌 뒤로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남간정사 앞에는 자연지형에 따라 만든 자연형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둥근섬을 두고 왕버들을 심었다. 남간정사는 흐르는 계곡물 위에 건물을 지었다. 최대한 자연 경관을 유지하면서 건물을 지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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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사적공원 유물관 ⓒ 여경수


우암서적공원 안에는 우암 송시열을 소개하는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 안에는 우암 송시열의 유품과 그의 일대기표, 그가 집필한 각종 문헌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10여분 정도 우암 송시열에 관한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유물관 관람을 통해서 평소 우암 송시열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첫째는, 우암 송시열은 부유한 가문의 자손이 아닌 가난한 학자 집안 출신의 자손이었다. 두 번째로는, 우암 송시열은 남인과 그 어떤 교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젊은 날에는 당시 남인을 대표했던 여헌 장현광과도 교류를 했다. 세 번째로는, 우암 송시열은 청나라를 물리치고자하는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구제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1657년 우암 송시열이 효종에 올린 상소문인 기축봉사이다. 기축봉사의 내용 중에는 조선이 부강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올바른 인재를 등용해야하며,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해야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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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사적공원 이직당 ⓒ 여경수


유물관 위에는 서원의 형태를 재현해 놓은 이직당(以直堂)이 자리잡고 있다. 우암 송시열은 평생 곧을 직(直)자를 그의 학문 세계의 화두로 삼았다. 이직당 오른쪽에는 모든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는 뜻의 인함각(忍含閣), 왼쪽에는 모든 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라는 뜻을 담은 명숙각(明淑閣)이 있다.


우암사적공원을 거닐면서 우암 송시열에 대한 양극단적인 평가를 생각해보았다. 부정적으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새로운 강자가 되었음에도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보수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 긍정적으로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 성리학을 기반으로한 유학의 정통을 조선으로 들여와서 조선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으려했던 사상가라는 평가이다. 우암 송시열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를 뒤로하고, 우암사적공원을 찾으면 우암 송시열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우암사적공원 #이직당 #기축봉사 #남간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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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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