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권우성
판사들이 뿔났다. 대법원이 자신들의 사법개혁 논의에 제동을 건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퍼지면서 법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13일 전국 법원에서는 대법원의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혹을 두고 잇달아 판사회의가 열렸다. 지난 2월 이 연구회가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 등을 주제로 판사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한 지 며칠 뒤, 법원행정처는 그동안 문제 삼지 않았던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 규정을 갑작스레 들고 나왔다. 또 법원행정처로 발령 난 A판사에게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축소할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판사들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 '독립성'이라는 법원의 중대한 가치를 대법원이 스스로 저버린 채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다.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은 13일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고 철저히 조사한 뒤 그 결과 전부를 숨김없이 공개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한 "조사 결과 법관의 독립 또는 기본권 침해 사실이나 사법행정권 남용 사실이 확인될 경우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위한 합당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라고 했다.
판사들은 대법원이 추진하는 진상조사도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단독판사들은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이번 일에 깊숙이 개입한 만큼 진상조사기구에는 법원행정처가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인천지법 단독판사들도 조사기구의 구성과 조사대상·범위 등을 정하는 데에 법관들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 법원들은 3월 전체판사회의에서 이번 일을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춘천지법도 13일 회의 내용을 곧 의결한다.
안팎으로 부글부글... 대법원, 이인복 전 대법관 진상조사위원장으로 지난 2월 법원을 떠난 윤나리 변호사는 3월 14일자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일을 "대법원의 '법원발 블랙리스트사건'"이라고 표현했다. 또 부당한 지시에 거부하며 소속법원으로 복귀한 A판사의 일을 두고 '본인이 원하지 않아 인사를 취소했다'던 법원행정처 해명이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사태 책임자들이 법원에 계속 남아 다시 법대에 앉는 날이 온다면, 변호사로서의 내 첫 사건은 이들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대법원은 부랴부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13일 이인복 전 대법관에게 진상조사위원장을 맡겼다. 그가 법원 내에서 신임이 두터울 뿐 아니라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없다는 점 등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이 전 대법관은 같은 날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제가 평생 몸담고 사랑해온 법원이 더 이상의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중책을 맡기로 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전 대법관은 또 "객관성과 중립성, 공정성이 최대한 확보될 수 있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겠다"며 17일까지 적임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차성안 판사는 이와 관련해 14일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려 "전국 30개 법원별 대표들과 이 전 대법관이 모여 정한다면 모두 승복하고 신뢰를 보내지 않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이 전 대법관은 양 대법원장에게 진상조사에 앞서 논란의 중심에 선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을 두고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양 대법원장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임 차장을 직무에서 배제, 사법연구 업무를 하도록 인사발령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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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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