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우유, 범인은 바로... 나였다

[단짠단짠 그림요리] 우유급식

등록 2017.03.15 17:18수정 2017.03.1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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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유난스러웠다. 느닷없이 우유를 컵에 따라 마시고 싶었다. 교실 뒤에서 물컵을 가져와 우유를 부었다.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데, 창가에서 칠판지우개를 털던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왜 우유를 컵에 먹어?" "음, 그냥" 친구와 멋쩍은 웃음을 나눴다. 햇살 사이로 하얀 분필가루가 어지럽게 오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시작할 무렵,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오늘 우유를 못 먹었는데요."

우유 한 개가 없어졌다. 담임은 먼저 주번에게 우유를 잘 받아왔는지 확인했다. 주번은 틀림없이 우리 반 번호가 적힌 우유박스를 가져왔다고 했다.

"오늘 우유 먹은 사람 손들어 봐라. 오늘 1일이다."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달이 바뀌었구나!'


며칠 전 우유급식신청서를 집으로 가지고 간 날, 엄마는 "다음 달부턴 우유를 끊어라"라고 했다. 아빠가 직장을 그만 두고 사과 장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4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우유급식을 끊은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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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친구의 우유를 마신 건 나였다. ⓒ 심혜진


그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범인은 나였다. 하지만 손을 들 수 없었다. 선생님은 손을 든 사람의 수를 세었다. "맞는데..."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주겠다며 아이들을 설득했다. 나는 끝내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은 주번을 일으켜 세웠다. 손을 들지 않은 아이들 중에서 오늘 우유 먹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교실에 긴장감이 돌았다. 두 아이가 두리번거리며 아이들을 살폈다. 그날 나는 하필이면 컵에 우유를 따라 마시다 주번과 눈이 마주친 터였다. 나는 주번의 눈을 피했다. 할 수만 있다면 책상 아래에, 아니면 신발주머니에라도 몸을 구겨 넣고 싶었다. 선생님의 꾸지람과 채근에 주번의 얼굴이 벌게졌다. 주번은 끝내 우유도둑을 찾아내지 못했다.

선생님은 "남의 것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는 훈계를 했다. 그리고 "너희도 책임자"라며 애꿎은 주번을 나무라는 것으로 그 일은 마무리됐다.

그날부터 나는 주번이었던 그 친구를 피했다.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다른 감정들이 나를 괴롭혔다. 우유를 못 먹게 한 엄마가 밉고, '그깟 우유 한 개'로 아이들을 몰아세운 선생님도 미웠다. 하지만 가장 미운 건, 그날 우유를 마신 나였다. 갑자기 가난해진 나, 달이 바뀐 줄도 모르고 허세라도 떨 듯 컵에 우유를 부어 마신 나, 친구가 곤혹을 치르고 있는 걸 보면서도 창피함에 손을 들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올해 작은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응원을 할 겸 입학식에 갔다. 선생님이 나눠준 가정통신문 중 우유급식신청서에 눈길이 멎었다. 30년 전 그 일이 다시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지금도 누군가는 이 종이 한 장에 한없이 작아지겠구나... 이 아이들 중 누군가는...' 다시 그날처럼 심장이 뛰었다. 칠판을 향해 앉은 아이들의 뒷모습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우유급식을 하는 게 옳은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잠시 제쳐두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적어도 아이들이 먹는 것 앞에서 만큼은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급식을 해야 할 정도로 아이들에게 우유가 필요하다면, 그 좋은 것, 공평하고 당당하게, 다함께 누릴 수는 없을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우유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먹을 수 있고, 원치 않는 사람은 안 먹어도 되는, 그 선택권이 아이에게 주어지는 상상 말이다. 아이들에겐, 우리 모두에겐, 그럴 권리가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우유급식 #학교 우유 #그림요리 #단짠단짠 그림요리 #무상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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