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대구행 기차를 타고 산을 오르다

대구 앞산전망대를 다녀와서

등록 2017.04.04 13:59수정 2017.04.0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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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가.

그래서 떠났다. 10년도 더 된 구닥다리 문구를 들먹이며, 아닌 밤중에 대구로.


나는 떠났다. 열심히 일한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떠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메뉴를 고민하던 중,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올라왔고, 일상에 대한 신물인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떠나야 한다. 지금 당장.'

간단한 옷가지를 챙긴 뒤 기차역으로 향했다. 우연히 대구를 홍보하는 안내서를 보고 망설임 없이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생각해보니 몸이라기보다는 몸짝이다. 매일 무료하게 사는 삶이 짐짝 같았기 때문에.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났다. ⓒ pixabay


정해진 것은 없었다. 숙소도, 할 것도. 그제야 내가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들어가 있던 대구 안내서를 펼쳤다. 앞산 야경이 볼만 하단다. 마침 야간기차를 탔으니 야경이 딱이었다.

그러나 '야경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내 마음을 어찌나 잘 아는지, 안내서에 대구 막창집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자 먹을 생각을 하니 조금 쓸쓸했다. 혹시 몰라서 여행자 카페에 글을 남겼다. '지금 대구 막창 같이 드실 분?'

대구는 지하철이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일 것이다. 카페를 통해 연락한 그 남자와 안지랑역에서 만났다. 막창 골목은 안지랑 역에서 가까웠다. 그는 혼자 여행 중이며, 현재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추천해준 현지(?) 맛집으로 이동했다. 막창 집에서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나눴다. 혼자 여행 중인 이유부터 아무도 모르는 비밀까지.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술술 털어놓기도 한다. 아마도 그 사람이 '완전한 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 입으로 비밀을 말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기보다 스스로가 어색해진다.

그것은 타자화된 나와 마주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혼자 가는 여행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자화된 자아를 달래려고 술을 한·두잔 기울였다. 그 후, 나는 생에 가장 미친 짓을 한다.

사실 앞산 야경은 반 포기상태였다. 술을 마셨을 뿐더러, 막창 집에서 우방랜드에 대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막창집 주인은 우방랜드에서 보는 야경이 앞산에서 보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호기가 생겼다. 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느끼고 싶었다. 비밀을 털어놓는 것으로 타자화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난 지금 대구에 돌발여행을 오지 않았는가?

대구 앞산 전망대에서 술처먹고 산에 올라 죽기 진전에 마주했다. ⓒ 천재상


산행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산 중간 중간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맞서지 말고 경찰로 신고하라는 문구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밤 12시에 혼자 산을 타는 사람이 더 수상해 보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무장공비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음직하다.

점점 체력이 떨어졌다. 술 때문에 어지러웠다. 발을 헛디뎌 구르기도 했다. 하지만 최악은 길을 잃었던 것이다. 무지하게도 산행을 GPS에 의지했다. 믿었던 '다음지도'는 나를 배신했다.

한번 올라갔던 산을 다시 내려와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사진으로 보았던 앞산 아래의 별빛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점점 공기가 서늘해졌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대도 높아졌다.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별빛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마침내 앞산 전망대에 다다랐다.

앞산 야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발아래에서 별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망대는 시원하다 못해 아린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내가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 스쳐지나가는 별들을 관찰했다. 전망대에서 본 별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움직이면 별들도 움직였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하면 나의 몸짝도 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와 저들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이내 마음이 놓였다. 아마 저 별들도 몸짝이 되면 이곳에 올라와 다른 별들을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려갈 때 즈음이면 별이 되어 있겠지.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

오만가지 오그라드는 생각을 하며 나의 돌발여행은 끝이 났다. 덕분에 하룻밤 새 일어난 일이라곤 믿기지 않을 경험들을 했다. 이것은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여행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경험을 원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을 위해,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한 주문을 외워주겠다.

주문. 피청구인 일상의 무료함을 파면한다.

이제 당신은, 떠날 수 있다.
#대구 #앞산 #대구앞산 #돌발여행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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