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맞춤법이 틀려도 저희 하고픈 말을 글로 옮겨요. 우리 어른도 이처럼 글을 쓰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최종규
고흥에서는 한 달 남짓 비가 안 와요. 이렇게 비가 안 오니 밭에서 여느 풀이 거의 안 돋아요. 땡볕이 한 달 넘게 내리쬐기만 하니까 그토록 질기거나 대단한 목숨을 뽐내던 풀조차 한두 번 손으로 뽑으니 더 기운을 못 내고 말라비틀어지기만 하네요.
그런데 있지요, 풀을 뽑지 않은 땅은 사뭇 다릅니다. 뿌리가 땅속에 있도록 한 채 풀포기만 낫으로 베어 눕혀 놓으면, 이때에는 아무리 땡볕이 오래 가더라도 흙이 마르지 않습니다. 풀포기를 베어서 덮은 흙은 오랜 가뭄에도 가물지 않는다고 할까요.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숲은 사람이 몇 달이든 몇 해이든 물을 안 주어도 풀이나 나무가 안 말라요. 풀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지는 자리, 이른바 숲에는 가뭄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삶터가 다릅니다. 삶터가 다른 만큼 겪는 삶이 다릅니다. 겪는 삶도 마음씨마다 다르기 마련이기에, 누구는 풀을 잡초로 보면서 모두 뽑아내고, 누구는 농약을 써서 풀을 모조리 죽이며, 누구는 불을 질러서 활활 태우지요. 이때에 겪는 삶은 다 다르기 마련이요, 다 다른 삶에 맞추어 다 다른 이야기가 피어나서, 다 다른 글이 샘솟아요.
자, 저는 이렇게 제가 지켜보는 대로 제 삶을 찬찬히 글로 옮겨요.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적에는 누구나 이렇게 늘 지켜보거나 바라보거나 겪거나 느끼는 대로 쓸 수 있어요. 가장 쉬운 글이고 가장 수수한 글이에요. 우리가 서로 만날 적에 인사하며 주고받는 말처럼 쓸 수 있는 글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로 글을 쓸 수 있어요.
여기에 살을 하나 붙인다면, '살아가는 대로 쓰되, 살면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낀 대목을 골라서 쓸' 수 있어요.
아주 천천히발자국 소리조차 안 내고살금살금 다가서며더 천천히손을 뻗어드디어 바로 앞에나비를 잡는구나 싶더니내 손끝을 톡치고펄렁펄렁 날아가는멧범나비사는 대로 쓰는 글이지만, 사는 대로만 글을 쓰면 때로는 밋밋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살며 활짝 웃던 일'이나 '살다가 눈물이 흐른 일'이나 '사는 동안 노래가 샘솟은 일'을 골라서 쓸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늘 비슷하게 겪거나 거의 똑같이 하는 일'을 날마다 엇비슷하게 글로 쓴다면 재미없거나 질릴 수 있어요. 비슷하거나 같은 말을 동무나 이웃한테 들려준다면 동무나 이웃도 우리 이야기가 이제는 따분할 수 있고요.
이다음으로 또 한 가지 글을 생각할 수 있어요. 첫째는 '사는 대로' 쓰고, 둘째는 '살며 기쁜 일'을 쓴다면, 셋째는 '살고 싶은 꿈'을 써요.
곧꽃이 피어나는곳이 됩니다이곳저곳 골골샅샅그곳에도 골고루곧곱게 꿈꾸는곳이 되어요곧게 서고고이 웃고고슬고슬 고소한고마운 살림꽃씨를곳곳에 심지요.꿈을 그리면서 쓸 적에는 그야말로 우리 꿈을 스스로 사랑스레 생각하면서 쓰면 돼요. 다른 사람 꿈을 들여다보거나 옆사람 눈치를 볼 까닭이 없어요. 앞으로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을 기쁜 웃음으로 그리면 돼요.
아무리 훌륭하거나 멋져 보이는 글이 있어도 구태여 다른 사람 글을 따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 마디를 보태어 본다면, 베껴쓰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베껴쓰기를 한자말로 필사라고도 합니다만, 베껴쓰기나 필사 모두 글쓰기하고 동떨어져요. 베껴쓰기나 필사를 하면 할수록 내 삶에서 멀어져요.
그러면 글이나 책은 안 읽으면 좋을까요? 네, 맞습니다. 글이나 책은 안 읽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지을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살림으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살림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슬기롭게 가꿀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글이나 책은 왜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제살림을 지을 적에 이웃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