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호수1971년 4월 16일 잠실섬 매립을 위한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이로써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은 사라지고 잠실섬은 육지가 되었다. 물막이 공사 결과 송파강의 일부는 석촌호수가 되었다.
전상봉
서울시가 잠실섬 일대를 매립하기 위해 '잠실지구 구획정리 사업 공유수면 매립 인가신청서'를 건설부에 제출한 것은 1969년 1월 21일이다. 건설부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회신을 미루다가 1970년 7월 23일 "이 사업은 서울시가 직접 시행하기보다는 민자사업으로 시행함이 바람직하다"는 답변과 함께 신청서를 반려했다.
1971년은 선거의 해였다. 그해 4월 27일은 7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5월 28일은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양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경제기획원 부총리 김학렬은 건설사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그 대가로 잠실구획정리사업을 허가해줬다.
잠실지구 매립공사는 정치자금을 상납한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에 돌아갔다. 이들 건설사들은 공동으로 출자해 만든 경인개발(주) 명의로 1970년 11월 3일 '잠실지구 매립인가 신청서'를 서울시에 제출, 이듬해 2월 1일 건설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아냈다.
물막이 공사는 1971년 2월 17일 시작됐다. 잠실섬 북쪽의 신천강을 넓히고, 남쪽의 송파강을 막아 강의 흐름을 바꾸는 공사였다. 공사를 쉽게 마무리하기 위해 1971년 4월 15일 오후 4시부터 12시간 동안 청평댐의 방류를 중단해 한강의 유속을 늦추고, 수위를 20cm가량 낮추었다.
1971년 4월 16일 오전 10시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잠실섬 위쪽으로 흐르던 신천강의 폭을 200m 확장하는 하천절개공사에는 연인원 2만 6천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이로써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은 사라지고 잠실섬은 육지가 됐다. 그런데 물막이 공사는 행정착오로 1971년 6월 19일에야 실시계획 인가가 난 불법적인 것이었다.
물막이 공사가 끝나자 공유수면 매립공사와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시행됐다. 구획정리사업의 동시 시행은 서울시의 주장이 받아들여 진 결과였다. 건설부는 1971년 5월 5일 공유수면 매립지구를 포함한 잠실지구 935만5,311㎡를 구획정리지구로 지정했다. 그런 다음 6월 11일 구획정리사업 시행 명령(건설부 공고 제49호)을 내렸다.
구획정리사업은 1971년 6월 19일 시작됐다. 현대, 대림, 극동, 삼부, 동아건설이 공동출자한 잠실개발(주)이 매립공사의 권리 일체를 승계해 구획정리사업을 시공했다.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3년 계획으로 1974년 6월 19일 준공을 목표로 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에 직면했다. 하천부지를 메울 흙이 태부족이었던 것이다. 흙이 부족하자 매립공사는 두 차례나 설계 변경됐고, 그때마다 서울시는 공사 면적을 축소해 인가했다.
잠실개발(주)은 부족한 흙을 보충하기 위해 잠실섬 인근의 몽촌토성을 헐자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부족한 흙은 약 2년간 시민들이 배출한 연탄재가 주종인 쓰레기로 대신했다. 매립공사는 연탄재와 쓰레기로 1차 매립한 다음 서울시내 건설공사 현장에서 배출된 흙을 가져와 복토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두 차례에 걸쳐 완공됐다. 1977년 3월 9일과 1978년 6월 29일이다. 매립된 총면적은 75만 3398평으로 이중 10만 8682평은 제방 및 도로용지로 국유화됐고, 나머지 64만 4716평은 매립자인 잠실개발(주)에 귀속됐다.
개발의 신천지가 된 잠실
▲잠실5단지 아파트잠실 5단지는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의 주택 건설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잠실 5단지는 23평형과 25평형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수였다.
전상봉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 뽕밭이었던 잠실섬은 개발의 신천지가 됐다. 잠실지구 개발사업은 1973년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시작됐다.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은 잠실섬 일대 340만 평의 대지에 잠실주공 1~5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건설하는 것이 골자였다.
특기할 것은 잠실지구사업이 근린주구론(近隣住區論)에 기초해 수립됐다는 사실이다. 근린주구론은 미국의 도시계획가 페리(Clarence Arthur Perry)가 주장한 근린단위(Neighborhood Unit)이론에 따른 것이다. 모든 가족들은 자신의 생활권역에서 공공시설과 환경조건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근린단위이론의 요지이다.
근린단위이론의 여섯 가지 내용은 초등학교가 입지할 수 있는 규모의 확보와 편리한 접근성, 적당한 규모의 놀이공간과 구매시설의 확보, 자동차로부터 안전한 생활영역의 확보와 도로망의 구축 등이다.
대한주택공사가 시공한 잠실 1~4단지 기공식은 1975년 2월 6일 열렸다. 1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한창이던 그해 4월 대통령 박정희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양택식 전 서울시장을 임명했다. 양택식은 부임과 함께 잠실단지건설본부를 설치하고 잠실 1~4단지를 연내에 완공하기 위해 '180일 작전'을 전개했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속도전을 펼친 결과 잠실주공 1~4단지는 그해 말 완공될 수 있었다.
잠실 1~4단지 건설 공사에는 연인원 280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됐다. 1~4단지는 5~6층 높이의 연탄 난방 아파트로 총 1만 1660세대 규모였다. 이즈음 서울시도 119개동 4520세대의 잠실시영아파트 건설에 매진했다. 잠실시영아파트는 5~6층 높이의 13평형 아파트로 불량 주택에 살던 철거민들에게 분양될 예정이었다.
1976년 8월 착공된 잠실 5단지는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의 주택 건설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잠실 5단지는 23평형과 25평형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수였다. 단지의 규모면에서도 1~4단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3단지가 5만 3828평, 4단지가 4만 2249평인데 비해 5단지는 9만 8815평이었다.
넓은 대지 위에 건설된 5단지는 아파트 동과 동의 이격거리가 70m로 1~4단지 40m에 비해 일조권이 좋았다. 또한 잠실 5단지는 그동안 12층까지 건설 가능했던 아파트단지들과는 달리 15층으로 지어진 고층 아파트단지였다.
1978년 11월 5단지의 완공과 함께 잠실주공 1~5단지 종합준공식이 개최됐다. 3년 만에 완공된 잠실아파트 단지는 단일 업체가 건설한 주택공사로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초대형 공사였다. 오일쇼크의 여파 속에 지어진 잠실 1~5단지는 주거 환경 개선이라는 국가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이 총동원된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잠실아파트단지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근린주구이론에 기초한 잠실지구 아파트단지는 자족 가능한 단지들의 병렬적인 집합이었다. 각 단지는 독립된 생활권을 이루지만 다른 단지와는 단절된 폐쇄적인 구조였다. 다시 말해 잠실 아파트단지는 이웃과 이웃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도시민의 파편화된 주거공간의 본격적인 등장을 의미했다. 이후 잠실 1~5단지는 강동구 둔촌단지, 강남구 개포단지, 경기도 과천시 주공 아파트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잠실 1~5단지는 파편화된 구조 속에 갇혀 사는 도시민들의 서글픈 현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작가 조세희는 상전벽해의 땅 잠실에는 민들레조차 살지 못하는, 오직 시멘트와 철근에 의해 유지되는 척박한 사막과 같은 곳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둑을 쌓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 도로를 내기 전에는 범람한 강물이 여름 잠실을 덮쳐누르곤 했었다. 모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중략) 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 조세희, <민들레는 없다>, [시간여행], 문학과지성사, 1983년,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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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로 메운 땅, 박정희 한 마디에 금싸라기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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