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준비중인 유윤기씨. 요즘은 홍성문화연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재환
함께 지내다 보면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될 정도로 장애를 잘 다스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들이 휠체어를 타고 언덕을 힘겹게 오르거나, 차에 휠체어를 싣는 모습에서 그들이 지닌 장애를 새삼 확인하게 되지만 말이다.
얼마 전 충남 홍성으로 이사 온 유윤기(41. 예명 동민)씨도 그런 사람이다. 윤기씨는 지난 2월 홍성으로 오자마자 홍성문화연대에 들어갔다. 윤기씨는 홍성문화연대에서 공연기획과 노래를 주로 담당한다. 물론 필요할 때는 장구와 꽹과리, 태평소 등을 연주하기도 한다.
그의 다양한 풍물 실력은 비장애인 시절부터 갈고 닦아왔던 것들이다. 어쩌면 그가 장애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풍물이 주는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윤 씨는 20대 초반 사고를 당했다. 재활 훈련을 마치고 잠시 서울에 살 때도 풍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물론 꾸준한 복식 호흡 훈련으로 사고 후 잃었던 '목 소리'도 되찾았다. 풍물패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윤기씨는 "서울에 살 때도 <소리밭>이라는 장애인 풍물패를 만들어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윤기씨는 <소리밭>을 매개로 홍성문화연대 회원인 문철기씨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윤기씨는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닉네임이 '귀천'일 정도로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좋아 한다. 윤기씨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처럼 잘 살다가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이 인터뷰도 삶을 즐기며 노력하는 윤기씨를 응원하기 위해 진행했다. 윤기씨는 요즘 홍성문화연대 활동 외에도 두 개의 풍물 강습을 맡아 진행한다. 아래는 지난 30일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장애를 얻기 전부터 풍물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임실 필봉농악을 6개월 정도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3년 풍물 동아리 활동을 했다."
- 군 입대 바로 직전에 장애를 입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군대 가기 직전 10일인가, 일주일 전 쯤인가 아무튼 군입대를 앞두고 교통사고가 났다. 막 21살이 되던 시점이었다."
"막상 재활원에서 나오지 엄청난 좌절감 밀려와" - 중도장애라서 장애를 적응하는 일 자체도 꽤 어려웠을 것 같다."물론 나만 겪은 일은 아니지만 무척 힘들었다. 중도장애를 겪게 되면 혼란기가 오게 마련이다. 재활원에 있을 때는 오히려 잘 몰랐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니까 엄청난 좌절감이 밀려왔다. 우선 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나만 초라해 지는 듯한 자괴감과 실망감도 들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형제들 때문이었다. 더 이상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재활 치료 후 잠깐 택시 운전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택시 운전은 서울에 올라가 아주 잠깐 동안 했다. 우연히 TV를 통해 전남 여수에서 장애자 분이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장애인도 택시운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는 빨리 독립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수술비를 마련하느라 어머니와 형이 고생을 많이 했다. 하루라도 빨리 독립을 하는 것이 가족들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최근에는 금산에서도 살았는데, 그곳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장애인 생활시설에서 행정실장 일을 했다. 각종 정산 작업은 기본이고, 시설의 오만가지 잡다한 일을 다 했다. 수기로 되어 있던 모든 기록과 문서를 전산화하느라 고생을 좀 했다.(웃음)"
- 특별히 홍성으로 이사를 온 이유가 있나."이사하고 싶은 1순위 장소는 사실 광주였다. 홍성은 후순위였다. 광주로 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집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임대 아파트를 신청하면 장애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최근에는 장애인들에 대한 우선권이 없어졌다. 광주에서 다시 예술단 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을 구하지 못해 2순위였던 홍성으로 오게 된 것이다. 물론 홍성문화연대 식구들과는 이전부터 같이 공연도 하며 친분을 쌓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