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과거사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이창준 검사를 방청석에서 바라보는 황시목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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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준 검사가 읽은 시는 실제 존재합니다. 양성우 시인이 쓴 <겨울공화국>입니다. 양 시인은 1972년 2월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을 촉구하는 구국기도회에서 이 시를 낭송했다가 중앙여고에서 파면됐고, 이후 발표한 두 편의 저항시가 국가모독죄 및 긴급조치9호에 위반된다며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습니다. 2005년 이 사건을 조사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보상심의위)가 중앙여고에 복직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복직을 거부했습니다. 그를 처벌한 근거였던 국가모독죄와 긴급조치9호도 각각 2015년과 2013년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라고 결정났지만 시인의 억울함이 완전히 풀리지는 못했습니다.
드라마에서 검찰은 잘못된 과거사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위헌 법률의 직접 실행한 기관으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검찰은 유일하게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기관으로 유명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를 바로잡겠다는 기조에 따라 국정원과 국방부, 경찰이 자체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검찰만은 미온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법부도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의 취임사를 통해 "과거 잘못을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는데도 말이죠.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검찰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했습니다. 사법부가 재심을 열고 과거사 사건에 무죄를 선고하면 검찰이 불복해 상고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이 대표적입니다. 2014년 서울고등법원은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유서를 대필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참고기사:
[타임라인] 강기훈의 23년).
하지만 검찰이 곧장 상고했고 이듬해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면서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23년 만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사건이 검찰의 불복으로 1년이나 더 소요된 것입니다. 당시 강씨는 간암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이어진 '1차 인혁당 사건' 재심 때도 반복됐습니다. 2014년 검찰은 서울고법의 무죄 선고 엿새 만에 상고장을 제출했지만 대법원은 과거사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검찰의 불복이 아집에 빠진 결과는 아니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이런 검찰의 조직논리에 균열을 내는 검사도 있었습니다. 현재 의정부지검에 소속된 임은정 검사는 지난 2012년 반공법 재심 결심 공판에서 '백지 구형'(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달라고 판사에게 의견을 내는 일)을 내리라는 상부 지시를 어기고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공판 검사 교체를 명령한 상부에 맞서 법정 출입문까지 걸어 잠근 채로 말이죠. 법원도 당일 무죄를 선고했지만, 임 검사는 이 일로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드라마 속 이창준 검사와는 다른 결과죠.
임 검사는 징계 취소 소송을 시작하며 이렇게 밝혔습니다.
"공익의 대표자이자 사회질서 유지의 책임자로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최종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이 구형이다. '백지 구형'은 분명한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엄격한 증명이 없거나 무죄 선고가 확실히 예상되는 경우에는 피고인에게 '무죄 구형'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3개월 앞선 같은 해 9월에도 임 검사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게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그때 그가 법정에서 낭독한 논고문은 지금도 유명합니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하였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더 많은 이창준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