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경기고등학교 서울 도심 고등학교 이전 방침에 따라 종로구 화동 소재의 경기고등학교는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로 이전하였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사진을 촬영했다.
전상봉
1966년부터 1980년 사이 서울의 인구는 하루 900명씩 늘어났다. 이 시기 서울시의 인구 증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가 없었다.
"1966∼80년의 15년간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500명의 인구가 늘었다. 이 증가수를 15로 나누고 다시 365로 나누면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롭게 늘어난 셈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씩 인구가 늘어나면 매일 22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통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의 쓰레기가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1966년 4월 4일 이후부터 제4공화국이 끝나는 1979년 10월 말까지 서울시 간부들에게는 토요일·일요일이란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4, 290쪽
서울시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주택과 상하수도의 부족, 슬럼가의 확장과 교통 혼잡, 학교 과밀과 사회 범죄의 증가 등 많은 문제를 동반하였다. 무엇보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유사시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울시의 인구를 억제하고, 강북에 밀집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는 방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라고 지시한 것은 이 같은 상황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된 영동지구1970년 11월 5일 양택식 서울시장이 남서울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영동지구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남서울개발계획은 영동지구에 60만 명을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서울시는 남서울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논현동 7194평의 부지에 12개동 360세대의 공무원아파트를 1971년 12월 28일 완공하였다. 또한 서울시는 1972년 3월 25일 영동지구에 1350동의 시영주택을 건설, 분양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압구정동, 논현동, 학동, 청담동 등지에 8개의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킬 수는 없었다.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 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강북 주요지구 내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각종 유흥시설 등의 신규 시설 일체를 불허한다." 1972년 2월 8일 서울시장 양택식은 강북 도심을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은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일대에 나이트클럽, 술집, 다방, 호텔, 여관 등 각종 유흥시설의 허가와 이전을 금지하고, 백화점, 도매시장, 제조업체, 학원, 대학의 신설과 증설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제한구역의 지정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중구 다동과 무교동, 종로구 공평동과 인사동 일대의 술집과 카바레, 고급요정 등의 접객업소였다.
서울시는 특정시설제한구역을 발표하여 강북 도심을 묶어둔 다음 1973년 6월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하였다. 개발촉진지구에서는 부동산투기억제세, 영업세,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 도시계획세, 면허세가 면제되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영동지구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건물을 신축할 경우 등록세와 취득세를 면제해주었고, 건설자금까지 융자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각종 혜택이 주어지자 다동, 무교동 등 도심 유흥업소들이 강남구 신사동, 논현동, 압구정동, 역삼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의 개편도 뒤따랐다. 서울시는 조례 제780호를 제정하여 1973년 7월 1일자로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를 통합, 성동구 영동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영등포구에 속했던 반포동, 잠원동, 서초동, 양재동, 우면동, 원지동 등 현재의 서초구가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영동지구는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살기 불편한 곳이었다. 대중교통편은 부족했고 관공서와 기업, 시장과 학교 등 기반 시설도 변변찮았다. 서울시 인구가 688만명을 헤아리던 1975년 영동지구(강남구, 서초구)에 거주하는 인구는 11만6716명(가구수 2만4637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10월 28일 문교부가 서울 도심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였다. 점차 심각해지는 도심 공해에서 학생들을 벗어나도록 하고, 서울 도심의 과밀 인구를 분산시킨다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가 이전 대상으로 지목된 이유는 당시 고등학교 진학률이 50%에 이르러 인구 분산 효과가 컸고, 규모가 큰 대학보다는 서울 사대문 안에 밀집된 고등학교를 이전하는 게 용이했기 때문이다.
강북 고등학교, 강남 이전이 시작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