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으로 가기 싫다" 경기고·휘문고·서울고의 '반발'

[강남공화국의 민낯8] 강북 고등학교 강남 이전기

등록 2017.08.17 16:13수정 2017.08.1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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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경기고등학교  서울 도심 고등학교 이전 방침에 따라 종로구 화동 소재의 경기고등학교는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로 이전하였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사진을 촬영했다.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경기고등학교 서울 도심 고등학교 이전 방침에 따라 종로구 화동 소재의 경기고등학교는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로 이전하였다. 서울도서관 3층 전시실 사진을 촬영했다.전상봉

1966년부터 1980년 사이 서울의 인구는 하루 900명씩 늘어났다. 이 시기 서울시의 인구 증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가 없었다.

"1966∼80년의 15년간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500명의 인구가 늘었다. 이 증가수를 15로 나누고 다시 365로 나누면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롭게 늘어난 셈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씩 인구가 늘어나면 매일 22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통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의 쓰레기가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1966년 4월 4일 이후부터 제4공화국이 끝나는 1979년 10월 말까지 서울시 간부들에게는 토요일·일요일이란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4, 290쪽

서울시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주택과 상하수도의 부족, 슬럼가의 확장과 교통 혼잡, 학교 과밀과 사회 범죄의 증가 등 많은 문제를 동반하였다. 무엇보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유사시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울시의 인구를 억제하고, 강북에 밀집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는 방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라고 지시한 것은 이 같은 상황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된 영동지구

1970년 11월 5일 양택식 서울시장이 남서울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영동지구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남서울개발계획은 영동지구에 60만 명을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서울시는 남서울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논현동 7194평의 부지에 12개동 360세대의 공무원아파트를 1971년 12월 28일 완공하였다. 또한 서울시는 1972년 3월 25일 영동지구에 1350동의 시영주택을 건설, 분양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압구정동, 논현동, 학동, 청담동 등지에 8개의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킬 수는 없었다.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 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강북 주요지구 내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각종 유흥시설 등의 신규 시설 일체를 불허한다."


1972년 2월 8일 서울시장 양택식은 강북 도심을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은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일대에 나이트클럽, 술집, 다방, 호텔, 여관 등 각종 유흥시설의 허가와 이전을 금지하고, 백화점, 도매시장, 제조업체, 학원, 대학의 신설과 증설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제한구역의 지정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중구 다동과 무교동, 종로구 공평동과 인사동 일대의 술집과 카바레, 고급요정 등의 접객업소였다.

서울시는 특정시설제한구역을 발표하여 강북 도심을 묶어둔 다음 1973년 6월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하였다. 개발촉진지구에서는 부동산투기억제세, 영업세,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 도시계획세, 면허세가 면제되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영동지구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건물을 신축할 경우 등록세와 취득세를 면제해주었고, 건설자금까지 융자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각종 혜택이 주어지자 다동, 무교동 등 도심 유흥업소들이 강남구 신사동, 논현동, 압구정동, 역삼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의 개편도 뒤따랐다. 서울시는 조례 제780호를 제정하여 1973년 7월 1일자로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를 통합, 성동구 영동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영등포구에 속했던 반포동, 잠원동, 서초동, 양재동, 우면동, 원지동 등 현재의 서초구가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영동지구는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살기 불편한 곳이었다. 대중교통편은 부족했고 관공서와 기업, 시장과 학교 등 기반 시설도 변변찮았다. 서울시 인구가 688만명을 헤아리던 1975년 영동지구(강남구, 서초구)에 거주하는 인구는 11만6716명(가구수 2만4637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10월 28일 문교부가 서울 도심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였다. 점차 심각해지는 도심 공해에서 학생들을 벗어나도록 하고, 서울 도심의 과밀 인구를 분산시킨다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가 이전 대상으로 지목된 이유는 당시 고등학교 진학률이 50%에 이르러 인구 분산 효과가 컸고, 규모가 큰 대학보다는 서울 사대문 안에 밀집된 고등학교를 이전하는 게 용이했기 때문이다.

강북 고등학교, 강남 이전이 시작되다

휘문고등학교 1972년 10월 28일 문교부가 발표한 서울 도심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방침에 따라 휘문고등학교는 종로구 원서동 소재 부지를 팔고,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하였다.
휘문고등학교1972년 10월 28일 문교부가 발표한 서울 도심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방침에 따라 휘문고등학교는 종로구 원서동 소재 부지를 팔고,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하였다.전상봉

고교평균화 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서울에는 5대 공립(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과 5대 사립(중앙, 양정, 배재, 휘문, 보성고)이라 불리는 명문 고등학교가 있었다. 이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고는 경기고였다. 경기고가 강남 이전의 첫 번째 대상으로 지목된 이유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고였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28일 강남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 경기고는 거세게 반발했다. 재학생과 졸업생은 물론 국내외에서 이전에 반대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서울시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종로구 화동에 위치한 경기고 교사를 리모델링하여 도서관(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고교평준화가 시행되기 전인 1973학년도에 입학한 학생들이 종로구 화동에서 졸업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런 다음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로 이전하였다.

두 번째로 지목된 학교는 휘문고였다. 사립인 휘문고가 이전하게 된 이유는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재단 소유의 땅이 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치동 부지를 개발할 수 없게 되자 휘문고 재단은 종로구 원서동 소재의 학교 부지를 팔고 강남으로 이전하는 것이 이익이라 판단하였다. 서울시의 주선으로 기존 학교 부지는 11억 원을 받고 현대건설에 매각한 휘문고는 1978년 1월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하였다.

세 번째 이전 대상은 서울고였다.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 서울고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두시위를 벌일 정도로 거세게 반발했다. 동문들 또한 조직적으로 이전 반대운동을 펼쳐 3천여 명이 연서명한 '모교 강남 이전 취소 건의서'를 청와대, 서울시장, 서울교육감 앞으로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유신체제 하에서 학교 이전 방침 철회는 있을 수 없었다. 서울고는 이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유리한 조건을 관철시켰다. 재학생과 동문들의 거센 반발을 지렛대로 서울고는 애초 관악구 신림동 남부경찰서 부근으로 확정 고시된 예정 부지를 변경, 1980년 6월 서초구 서초동 1526번지로 이전하였다.


경기고를 시작으로 진명여고에 이르기까지 강남으로 이전한 고등학교는 총 18개교이다. 이 가운데 15개 학교는 강남 4구(서초, 강남, 송파, 강동구)로, 양정고와 진명여고는 양천구 목동으로, 마포고는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하였다. 주목할 것은 학교 이전이 추진되던 1970년대 중후반 학급 과밀 문제가 심각했던 지역은 강남구가 아니라 영등포구, 관악구, 강서구였다.

당시 강남구는 고등학교 입학생이 부족하여 인접지역 학생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영등포구와 관악구, 강서구는 학교가 부족하여 이곳 학생들은 인근 지역 학교를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이 같은 사례를 보더라도 강북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은 교육 목적이 아닌 강남 개발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파트 분양을 위한 고등학교 이전 사례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들 또한 최대한의 실속을 챙기려 했다. 신축 교사는 기본이고, 기존 학교터보다 넓은 부지의 확보와 유망한 지역으로 이전하고자 했다. 경기고는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 기슭에 3만2천평의 부지(애초 예정 부지 2만3천평)를 제공받았다. 경기고의 이전 비용은 10억 원으로 당시 고등학교를 새로 짓는 비용보다 2배 많은 금액이었다. 1980년 6월 서초구 서초동 2만7천평의 부지로 이전한 서울고는 부지매입과 교사 신축에 85억 원이 들어갔다. 당시 20% 안팎의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더라도 1976년 경기고등학교의 이전 비용 10억원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금액이었다.

숙명여고의 경우 이전 예정지로 강남구 도곡동과 서초구 방배동, 관악구 신림동 등이 거론되었으나 강남구 도곡동 91번지가 확정되어 1981년 3월 이전하였다. 배재고는 1979년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관악구 신림동 난곡지구로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예정 부지가 공원부지로 지정되면서 1984년 2월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하였다. 경기여고는 서울시 교육위원회로부터 양천구 목동으로 옮길 것을 권유받았으나 1988년 2월 주공아파트단지가 조성된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전하였다.

기존 학교 부지를 매입한 재벌에게도 특혜가 주어졌다. 도심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서둘렀던 서울시는 매각을 주선하는 브로커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서울시의 주선으로 종로구 원서동 휘문고 부지와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고 부지를 매입하였다. 땅을 사들인 현대건설은 휘문고 터에는 대형 오피스빌딩을, 서울고 터에는 현대그룹 사옥과 호텔을 지을 계획이었다.

유동인구의 증가와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고층 건물의 신축은 도심 인구 분산이라는 학교 이전 명분에 반하는 것이었다. 현대건설이 기존 학교 부지에 고층 건물을 신축하겠다고 밝히자 비판 여론이 비등하였다. 여론을 의식한 서울시는 고층 건물의 신축을 제한했고, 규제가 강화되자 부지를 사들인 재벌이 반발했다. 난처한 처지에 놓인 서울시는 기존 학교터의 20~30%를 공원이나 주차장으로 만드는 조건으로 신축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휘문고 터에는 현대건설 사옥과 함께 원서공원이 조성되었다.

서울고가 위치한 종로구 신문로2가 2-1번지는 경희궁터이다. 이곳에 학교가 자리 잡은 것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경성중학교 교사를 지으면서다. 서울고가 이전하자 서울시는 이곳 부지를 현대건설에 매각하였다. 2만9841평에 달하는 서울고 부지의 매각 대금은 110억4600만 원이었다.

올림픽 선수기자촌아파트 1989년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한 보성고와 창덕여고는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분양을 촉진하기 위해 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올림픽 선수기자촌아파트1989년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한 보성고와 창덕여고는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분양을 촉진하기 위해 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전상봉

서울고 부지를 사들인 현대건설은 이곳에 28층 높이의 현대그룹 사옥을 짓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비등하는 여론에 떠밀려 서울시는 1980년 9월 서울고 터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공원화하겠다고 발표했다. 1986년 2월 서울시와 현대건설은 서울고 부지를 498억8700만 원으로 감정하여 지하철 2호선 강변역 부근의 5만621평의 택지와 맞바꾸었다. 등가교환으로 대토하였기 때문에 현대건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2배에 이르는 택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서울시는 388억4100만 원이라는 막대한 손해를 입고 말았다.

양정고와 진명여고는 목동신시가지의 조성을 위해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다. 목동신시가지아파트는 전두환 정권의 주택 500만호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1980년대 중반 서울시는 김포공항 주변 정비를 위해 목동 개발을 서둘렀다. 이대 부속병원을 이곳에 유치하였고 목동종합운동장을 건설하는 한편, 양정고와 진명여고를 목동아파트단지 안에 신축하였다.

아파트 분양을 위한 극단적인 이전 사례는 보성고와 창덕여고의 경우이다. 서울시는 1988년 6월 준공된 122개동 5539세대의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해 보성고와 창덕여고를 이곳으로 이전키로 했다. 서울시는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분양하면서 거주 기간에 상관없이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당시 8학군(강남구, 강동구)은 위장전입이 횡행할 정도로 입주자가 몰려들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8학군 소재 고등학교의 입학 자격을 거주 기간 순으로 배정하였다. 8학군 고등학교의 입학 기준인 거주 기간 원칙이 무너질 경우 엄청난 혼란이 예상되었다. 결국 거주 기간에 상관없이 보성고에 입학할 수 있다는 서울시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양택식 #영동지구 #경기고 #휘문고 #보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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