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8일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 관련 내용이 포함된 유서를 남기고 숨진 국정원 직원 임모(45)씨가 발견된 승용차.
연합뉴스
임 과장이 숨진 빨간 마티즈 안에서는 두 개의 번개탄과 세 장의 유서가 발견됐다. 세 장의 유서는 가족(2장)과 국정원장·차장·국장(1장) 앞으로 쓴 것이었다. 그는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하다"라고 자책하면서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라고 민간인 사찰 의혹 등을 전면 부인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이례적으로 다음날(7월 19일) '동료를 보내며'라는 3쪽짜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임 과장을 "국정원을 보호하기 위해 '무명으로 헌신'한 직원"이라고 추켜세우면서 "그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국가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촉구했다(관련기사 :
"자살할 이유 없는 유서... 국정원 정상 아니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임 과장의 죽음과 이례적인 국정원 직원들의 집단행동은 오히려 의혹을 키웠다. 국정원이 해킹프로그램 구입 논란과 그에 따른 민간인 사찰 의혹 등을 물타기하기 위해 임 과장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왜 메신저 '카카오톡·바이버' 해킹 문의했나? 국정원의 해킹프로그램 구입 사건에서 가장 먼저 규명되어야 할 부분은 '구입 목적'이다. 이는 민간인 사찰, 선거개입 등의 의혹과 직결된 사안이어서 중요하다. 특히 국정원과 해킹팀의 거래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걸쳐 있었고, 같은 시기에 RCS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국정원은 구입 목적을 "대북 해외정보전 기술분석을 위한 연구개발용"이라고 주장했다. 구입한 RCS 프로그램 라이선스 20개 가운데 18개는 대북정보수집용으로, 나머지 2개는 연구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인을 대상으로 RCS 프로그램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흔적은 상당하다.
먼저 해킹팀의 로그파일에서 국내 인터넷 IP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당시 야당(새정치민주연합)이 해킹팀의 자료를 분석해 총 138개의 한국 인터넷 IP를 찾아낸 것이다. 이들이 찾아낸 한국 인터넷 IP에는 KT와 LG유플러스, 다음카카오, 한국방송공사(KBS), 서울대 등이 포함돼 있었다(관련기사 :
새정치연합 "해킹팀 유출자료에 국내 IP 138개 발견").
당시 신경민 의원은 "유출된 자료에서 한국에 할당된 IP가 대량으로 발견됨에 따라 해외·북한 정보 수집용이나 연구용이라는 국정원의 주장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정원측은 "야당이 제기한 국내 IP는 국정원과 무관하다"라고 의혹을 부인했다.
신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대테러용 등으로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할 수는 있지만 어디에다 쓰느냐가 문제다"라며 "당시 우리가 몇날 밤을 새워 해킹자료를 뒤져서 국내에서 사용한 흔적을 찾아냈는데 언론이 이것을 무시했다, 결국 우리가 동력을 잃었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신 의원은 "당시 내가 국정원에다 '해외에 있는 북한 사람들이 삼성폰을 쓰냐, 아이폰을 쓰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라며 "그래서 '그런데 왜 해외에 있는 북한 사람들을 해킹했다고 하느냐? 한번 (해킹한 자료를) 가져와 봐라'고 했더니 그것은 기밀이라서 안된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국정원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메신저 카카오톡(카톡)의 해킹과 관련한 내용도 문의했다. 해킹팀 직원들이 지난 2014년 3월 27일 이메일을 통해 공유한 '출장보고서'(Trip Report)에는 "한국이 이미 요청했던, 자국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카카오톡에 대한 (해킹 기능 개발) 진행 상황에 대해 물었다"라고 기술돼 있다. 국정원이 카톡을 해킹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의 진행 정도를 해킹팀에 문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해킹팀의 한 직원은 비슷한 시기 이메일에서 "이미 우리 (해킹팀의) 연구개발팀에 카카오톡에 대한 내용을 지시했다"라며 "(국정원이) 카카오톡 건을 빠르게 처리해줄 것을 재촉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정원은 "북한 공작원들이 카톡도 쓰고 있기 때문에 해킹팀에 카톡과 관련해 문의했고,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라고 해명했다.
특히 국정원이 바이버를 해킹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정치인 사찰' 의혹으로 연결된다. 해킹팀과 국정원의 거래를 대행해온 나나테크의 한 관계자는 지난 2013년 5월 13일자 이메일에서 "우리는 지금 바이버 모니터링 시스템을 찾고 있다"라며 바이버를 해킹해 내용을 엿볼 수 있는지를 해킹팀에 문의했다.
미국 스마트폰 메신저인 바이버는 당시 안철수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들이 도·감청 등 사찰을 피할 목적으로 국내 메신저인 카톡 대신에 많이 쓰던 메신저다. 그런 점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해킹하기 위해 바이버 해킹 가능성을 타진해본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해킹팀의 홍보자료에도 바이버를 해킹할 수 있다고 기술돼 있다.
왜 삼성 갤럭시 국내 모델까지 직접 보냈나?국정원이 삼성 스마트폰인 갤럭시 국내 모델을 해킹팀에 직접 보낸 점도 민간인 사찰 의혹을 키웠다. 해킹팀과 나나테크가 주고받은 이메일에 따르면, 국정원은 지난 2013년 1월 삼성 갤럭시 S3를 해킹팀에 보내 '음성녹음 기능이 가능한지'를 분석해 달라고 의뢰했다. 갤럭시 S3를 직접 보낸 것은 국정원의 감시대상이 국내용 스마트폰에 있음을 뜻한다.
지난 2015년 6월에는 '갤럭시 S6'의 해킹을 문의하기도 했다. 특히 해킹팀 직원의 이메일에서는 "삼성 갤럭시 탭2, 삼성 GT-I9500, 삼성 SHV-E250S 등에 대한 해킹이 필요하다"라고 기술된 대목이 발견됐다. 국정원이 여러 가지 삼성 스마트폰 모델들의 해킹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또한 국정원 감시네트워크는 "국정원은 대북용이나 연구용으로 보기에 너무 광범위하게 RCS를 사용했다"라며 ▲ 해킹을 위한 '미끼' 메시지에 메르스 정보, 빌보드 차트, 학교 동문회, 포르노사이트 등 80여 개가 링크돼 있는 점 ▲ 애니팡2, 모두의 마블, 드래곤 플라이트 등 인기 게임 애플리케이션에 악성코드를 심는 실험을 실시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오병일 활동가도 "이것은 내국인을 감시할 목적으로 RCS 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정황적 증거들이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지난 2013년 10월 해킹팀에 의뢰해 '서울대 공과대학 동창회 명부'라는 한글 제목 파일에 해킹용 악성코드를 심은 것이나 비슷한 시기 조현호 <미디어오늘> 기자를 사칭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안함 1번 어뢰 부식 사진 의문사항 문의(미디어오늘 조현우 기자)'라는 제목의 파일에도 악성코드를 심어 달라고 요청한 점도 민간인 사찰을 의심케 한다. 만약 서울대 공대 출신 인사나 <미디어오늘> 기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은 "박사님"이 악성코드가 심어진 파일을 열었다면 그들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해킹됐을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는 RCS 프로그램으로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스모킹 건'(smoking gun, 결정적 증거)은 나오지 않았다.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지난 2015년 7월부터 RCS 프로그램을 탐지할 수 있는 오픈 백신 '디텍트'(Detekt)를 배포했지만(
관련자료) 아직까지 RCS 프로그램에 감염됐다는 신고는 없었다. 오병일 활동가는 "5만 명 정도가 오픈 백신을 다운받았는데 RCS 프로그램에 감염됐다는 신고는 아직까지 없다"라고 전했다.
라이선스 10개 구입했다는 것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