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남소연
탈춤패와의 인연은 어디서부터였을까.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소풍을 갔다가 풍물패와 사물놀이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풍물 공연이 있어서인지 자기들끼리 리허설을 하고 있더라고요. 또래 친구들은 놀이기구 타느라 바쁜데, 저는 그 사람들 연습하는 게 너무 재밌어 보여서 계속 그 주변에서 종일 구경만 했어요."그 풍경이 인상 깊게 남아 있던 그는, 2년 뒤 대학교에 합격한 뒤 '운명처럼' 다시 탈춤패를 만나게 된다. "합격증을 받으러 왔는데, 광장 앞에서 풍물을 치며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입학하고 나서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나처럼 직접 찾아간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더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들어간 탈춤패였지만 '음치·박치'인 탓에, 춤이나 풍물이 아닌 극본 쓰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마당극이란 풍물과 탈춤·민중요·연기 등을 합친 사회참여적 연극으로 채 의원은 "한국판 종합예술, 한국식 뮤지컬"이라고 설명했다.
"저는 춤을 못 추는 박치다 보니, 사회과학 세미나와 극본 쓰는 걸 주로 담당했어요. 그런데 사회과학 탈춤패니까 아무래도 사회 비판적인 극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주로 철거민과 등록금 투쟁, 동학농민혁명…. 그때 빈민활동 하는 친구들 얘길 듣고, 철거민 투쟁도 함께 했고요."채 의원은 "20여 명 선후배와 다양한 주제로 싸우면서 인생을 배웠다, 그 3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까지 얘기했다. 인터뷰 도중, 어색해하면서도 일어서서 시범 동작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한 번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맡은 적이 있다며 공연 중 남몰래 실수한 경험도 털어놨다.
"탈춤을 변형시켜 집단무를 추는데, 저 혼자 박자 놓쳐서 계속 실수했어요. 남들 일어날 때 앉고, 남들 앉을 때 서고. 근데 관객들은 제가 주인공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망나니가 칼춤 추는 장면에선 나무로 만든 칼 머리가 날아간 적도 있었네요. 물론 공연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끝냈지만."그가 "제 젊은 시절을 다 바친 곳"이라며 그렇게 애정을 쏟았던 탈춤패는 그러나 2009년 문을 닫았다. 독재정권 말기인 1978년에 창립해 3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운동권 성격을 띤 탓에 점차 신입생이 없어지면서 결국 폐쇄된 것이다.
그는 "졸업한 선배들이 다시 다 모여서 30주년 탈춤극을 추기도 하고, 신입생 모집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봤는데도 사람이 안 왔다"며 "후배들이 없다는 생각에, 더는 탈춤패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마음 아프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당시 함께 활동했던 "평생 친구들"은 여전히 주기적으로 따로 모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