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남소연
아버지를 간호하는 데 매진했던 그를 괴롭힌 것은 "내일 죽어도 좋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기대였다. 그는 정반대의 심정이었다. "내 인생은 어떻게 돼도 좋으니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아버지 곁에서는 고시 공부 책을 펴놓고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었다. 그의 '이중생활'은 점점 마음을 옥죄어왔다. 대학에 들어간 것까지 후회했다.
"'운이 좋아 수능 시험을 한 번 잘 받아서 괜히 힘이 드는구나, 실력대로 점수 받았으면 법대도 안 갔을 테고 아버지가 고시 합격에 기대도 안 할 것이고...' 환자 보호자로서만 집중하면 덜 힘들 거 같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시험도 계속 떨어지고 하니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합격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한 아버지의 실망이 너무 컸다. 아들을 향하는 것도 아닌 아버지의 화가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어떻게 버텼냐 물으니 "버틸 수밖에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던' 꿋꿋함. 그 이면에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암에 대해 공부해 보니, 암의 단초가 발생했다가 10~15년 과정을 거쳐서 자리를 잡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10년 전이면 고등학교 1학년 때더라고요. 그 때 6개월 동안 가출했어요. 처음에는 벨 한 번 울리고 전화를 끊는 방식으로 '잘 있다' 표시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조차 안 했어요. 그 때 아버지가 애를 많이 먹어서 암 기초인자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드는 거죠."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병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2007년 12월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다.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신 병원 쪽은 지나가지도 않았다. 선친 유품 또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게 많다.
'안 된다'과 싸워야 했던 20대 그는 20대 절반을 '환자 보호자'로 살았다. 20대에 가장 빛났던 때를 묻자 "특별히 빛났던 때는 없다"고 했다. 20대를 기록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대신, 그는 마흔을 갓 넘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8살 딸, 6살 아들, 5개월 된 딸이 있는데 아이들이 노는 모습, 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행복해요."이제는 담담하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삶. 그러나 행복을 찾기까지 '안 된다'와의 싸움을 계속 벌여야 했다.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그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이제 와서 되겠냐"고들 했다. 그럴 법도 했다. 고등학교 내내 그의 성적은 꼴찌권을 맴돌았다. 다른 사람은 비웃었지만 아버지만은 그를 믿어주셨다. "나는 아직도 네가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하셨다.
그 말에 용기를 얻고 다음 날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겠다 결심한 후 삐삐(호출기)부터 없앴다. 공부 외의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TV도 안 보고 사람도 안 만났다.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다. 결국 부산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입학한 게 사법시험 합격, 국회의원 당선보다 기분이 좋았어요. 사법시험은 '좋다'보다는 '앞가림은 하겠구나, 다행이다' 이런 마음이 컸고, 국회의원 당선은 부담감이 크더라고요. 순수하게 '성취했다'는 것이 좋았던 거 같아요."안 될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학교 합격 이후에도 계속 있었다. 아버지를 간호할 때는 "병원에서 그리 말하는데 뭘 자꾸 하냐, 받아들여라"고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는 "1차도 계속 떨어지는데 무슨 합격이냐"고 했다.
"객관적으로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본인이 목표를 정해서 의지를 갖고 시간, 정성을 들이면 반드시 50% 단계까지는 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부정적으로 '객관적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더라고요.""뒤쳐진 사람에게 희망을"... '꼴찌'가 전하는 메시지 비웃음과 비관에 맞서 그는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더불어 중요한 건 마음을 푸는 일임을 알게 됐다.
"선친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2번 사법시험을 총점 1점차로 떨어졌어요. 아버님 작고하시고 이제 시험 안 치려고 하다가 '그렇게 원하셨는데...'하면서 마지막으로 마음을 비우고 쳤어요. 장례 치르고 나니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합격하더라고요. '매사가 마음을 모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구나, 풀 때는 풀어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어요."그러다 다시 마음 모을 일을 시작했다. 2016년 총선에서 부산 연제구에 출마한 것이다. 정치 경험이라고는 없는 초짜 신인이 보수 텃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