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민청련동지회
민청련은 창립 당시에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학번의 소수 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했지만, 복학 국면을 거치면서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반 학번 사이의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들을 각 학교, 학번 별로 조직했는데, 기존의 기별 모임을 대신해 '계모임'의 이름을 모방해 '계반'이라고 불렀다.
계반은 서울의 주요 대학을 망라했고, 규모가 큰 서울대의 경우엔 각 단과대학 별로 나아가 각 학번 별로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성균관대 79학번으로 계반 모임에 참석했던 최경환(현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성균관대의 제적생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에서도 민청련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79학번에서는 내가 참석했다. 나는 낮에는 출판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민청련 일을 했다. 그때 우리 계반에는 은행원도 여럿 있었고, 이름 있는 건설회사 직원 등 나와 같은 직장인이 많았다. 대부분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주' 모임은 모든 활동방향과 노선이 논의되는 대의원회의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다. 또한 '계반'을 이끌며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고 선전물을 배포하는 실천단위였다. 밤을 세워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고 유인물을 뿌리고 하는 일들을 했다. 그리고 '계주'와 '계반'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비공개 조직이었다. 민청련이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오랫동안 조직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계주'와 '계반'과 같은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풍미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민청련 조직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민청련 내부의 분위기가 한껏 고양돼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선 우선 그때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의 고민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었다. 이른바 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던 원시 공산사회가 붕괴된 뒤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농노제 사회, 근대 자본제 사회로 단계적 발전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