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에서의 모습.
진정회 KBS PD
- 집회 준비하며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은데 몇 가지 소개해 주세요."집회 기획팀과 비슷하게 집회 때 짐도 나르고 장소 집회 끝나면 장소 정리하고 몸으로 도와주는 파업봉사단이라고 있어요. 이 파봉단을 가지고 조합원들에게 웃음을 주려는 목적으로 영상을 만든 적이 있었어요. 이 친구들이 모든 현수막을 직접 바느질해서 제작하고 피켓을 손으로 다림질해서 재활용하는 것처럼 오버해서 드라마처럼 찍었어요. 그만큼 파업 봉사단이 애쓰고 있으니 응원해 달라는 거죠. 예상대로 조합원들이 너무 재미있어하시고 후배들 고생한다고 응원해주시고 했는데 일부 조합원들은 그걸 다큐로 이해하셔서 미싱을 사주겠다고 하신 적도 있어요."
- 파업 기획단 영상도 있던데."그건 앞 영상의 2탄 격이에요. 네 분이 주인공인데 파업 기획단에서 영상 만드는 친구와 오디오 만지는 엔지니어 친구, 음악을 담당하는 라디오 PD 친구들이 고생하는 걸 과장해서 보여줬죠. 이것도 조합원들에게 웃음 드리려고 만든 거예요. 방송사에서는 무조건 통하는 유머 코드거든요. 대충 만들라고 말하면서 고퀄리티를 요구하는 선배라든지. 앞에서는 편집 잘했다고 칭찬해놓고 촬영 원본 어디 있냐고 묻는다든지. 바로 제가 그런 진상 선배 역할을 연기했는데 그걸 보고 또 일부 선배들이 저에게 애들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하세요. 그러나 그건 정말 연기입니다."
- 파업 기획팀에서 일하며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조합원들은 집회에 나오면 앞을 보지만 저희는 조합원들을 보고 있거든요. 파업 기획팀으로 제일 좋았던 것은 그 점인 거 같아요. 조합원들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 2주 차였던가 저희가 파업 중인 상황에서도 조합원 수가 계속 증가하다가 무려 2천 명을 돌파해서 축하하는 날이 있었어요. 2천 번째 조합원에게 무슨 선물을 드려야 빵 터질까 궁리하다가 이천 쌀 한 포대를 드렸어요. 임금님표 이천 쌀이니까 임금님 복장도 입혀드리고요. 다들 배꼽 잡고 웃는데 그 와중에 몇 분 선배님들이 웃으면서 우는 걸 봤어요.
저희 2009년에 50명으로 시작해서 800명인 상태에서 노조 사무실도 없는 상태에서 첫 파업 한 달 하고, 그 뒤로도 번번이 싸우고 지고 싸우고 지고, 소수 노조로서 차별받았던 설움, 그래도 이렇게 자라온 우리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자랑스러움 막 섞인 얼굴로 고참 선배들이 우는 걸 보니까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영화 <공범자들> 덕분에 '지난 9년간 공영방송에도 참 별일이 많았구나, 너희도 많이 고생했구나'라고 알아주는 분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물론 여전히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한 분도 많죠. 저희도 많이 힘든 세월이었고, 하느라고 했지만, 힘이 없어 번번이 졌어요. 하지만 저희의 패배가 사회에 미친 해악이 너무 커서 변명도 할 수 없었어요. 우리도 노력하고 있다고, 힘들다고, 다쳤다고, 아프다고 밖에다 이야기할 수 없으니 사정을 다 아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서로 다독여주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런 부분이 외부에서 보시기에는 지지리 못난 놈들끼리 서로 자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자기들끼리만 단결해서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나 싶기도 하겠지만 전 파업의 동력은 어떤 대외적인 상황이나 여론보다도 결국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믿어요. 그래서 저희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국민 영상보다 딱 조합원 500명만 울리거나 웃기면 되는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이겨서 들어가서 방송을 제대로 하기 전까지는 국민들의 진짜 지지는 못 받을 거예요. 그래서 그때까지는 의지할 건 우리 서로밖에 없어요. 기획팀 자리에 앉아서 조합원 한 분 한 분 웃는 얼굴 우는 얼굴 보고 있으면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와요. '사람이 우주다', '사람이 가장 큰 힘이다' 등의 말이 그동안은 사실 무슨 말인가 했거든요. 파업하면서 깨닫게 됐어요.
파업 승리해서 현업에 복귀하면 다시는 싸울 일이 없을까요? 아마 매일 매일 더 큰 싸움이 있을 거예요. 그 싸움을 혼자 또는 삼삼오오 각자 잘 치러내야만 방송이 정상화될 수 있어요. 잘못된 제도도 고쳐야 하지만 결국 언제나 사람이 문제고 사람만이 희망인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려요."이번 파업이 '정권 홍보 방송'으로 전락했던 지난 9년간의 방송 적폐를 청산하고 철저하게 내부 반성하고 고칠 부분 다 고치고 진짜 국민의 방송으로 가기 위한 싸움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지난 두 달간 집회에서 저희가 그동안 9년간 잘못했던 걸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다들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서 시기별로 살펴보고 그랬죠. 다시 봐도 참혹한 장면이 정말 많았어요. 안에서 싸운다고 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KBS 안에서 싸우는 저희가 늘 소수였고 번번이 실패했죠. 시청자들이 실망을 느끼고 대한민국이 이렇게 된 데 공범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
2008년 정연주 사장 해임 당시, 아니 그 뒤에 2009년까지만 해도 저희가 싸우면 공영방송을 지켜주겠다고 촛불을 들고 달려 와준 시민들이 계셨어요. 그 직전까지 보도와 프로그램을 잘 해왔던 거로 쌓은 신뢰가 있었고 KBS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주셨던 거죠. 하지만 그 뒤로 시간이 9년이나 흘렀고, 신뢰는 다 사라졌고 미디어 환경도 완전히 변했어요. 공영방송은커녕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지상파 방송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판국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지금 저희의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신다는 것은 저희가 최근에 내놓은 보도나 프로그램 결과물이 아니라 앞으로 잘할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동안 계속 저항해온 모습에 대한 인정인 거 같아서 더욱 감사하고 반드시 승리해서 공영방송은 되살릴 만한 가치가 과연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