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민청련동지회
여성부를 신설하다 2차 총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여성부를 맡을 책임자는 당시 집행부에서는 가장 낮은 학번인 77학번의 임태숙이었다. 다른 부서 책임자들과의 학번 차이가 커서 부장이 아닌 부장 대리로 임명했다.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은 당시 여성 운동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다른 진보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태동됐다.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좌우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여성운동 역시 좌우로 분립됐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은 다른 모든 진보운동과 함께 거의 소멸됐다.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보수적 여성운동은 집권세력의 보호 아래 일종의 봉사단체 수준에 그쳐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강권을 동원해 밀어붙인 경제개발 과정에서 억눌리고 짓눌린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 구성원의 상당수는 늘 여성이었다. 즉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컸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에 대한 모색이 새롭게 싹트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한국 여성운동의 모태 역할을 한 기구는 강원용 목사가 창설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사회교육과정을 도입했는데, 이 교육을 이수한 여성 활동가들이 1970년대 말에 '여성유권자연맹'을 만들어 여성의 정치적 각성을 위해 활동했다.
한편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신의 일부 여성들은 당시 미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위한 운동을 주창하며 1983년에 '여성의 전화'를 설립했다. 이러한 여성운동 단체들은 대체로 중산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가들, 특히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이러한 운동에 '부르주아적' 혹은 '프티 부르주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불렀다. 계급적 한계를 지닌 운동, 민중을 외면한 운동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리고 1980년에 여성학생운동가들의 인식을 확인해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여성유권자연맹 대표는 우리나라 여성운동 1세대 대표주자라고 불리는 김정례였다. 김정례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왕성한 활동력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운동가였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에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등 재야 민주세력과 가깝게 지내며 활동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잡아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김정례가 여성 대표로 참여한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여성유권자연맹을 탈퇴하고 별도의 조직을 만든다. 그것이 1983년에 창립한 '여성평우회'(약칭 여평)였다. 여평은 1987년에 여성민우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는 여성민우회가 이룬 큰 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