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인지면 모월리 일대, 개척단원들이 개간한 땅의 모습이다. 왼쪽은 1968년 항공사진, 오른쪽은 1977년 항공사진이다. 10년 사이 땅이 반듯하게 정리됐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서산개척단>(가제) 갈무리
아이들이 논에서 자라는 사이, 정부는 가분배했던 땅을 모두 국유지로 몰수했다. 1975년의 일이다. '내 땅'인 줄 알고 열심히 논을 만들고 있던 이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뜬소문으로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그들 손에는 '가분배증'이 있었다. 내 이름 석자가 또박또박 적힌, 충남 서산시 인지면장 명의의 증명서를 더 믿었다.
그러나 국가는 땅을 주지 않았다. '국유지'니 돈을 내고 사라고 했다. 1992년 국무회의에서 유상매각을 결정했고, 기획재정부는 '땅을 사라'고 촉구했다. 따를 수 없는 결정이었다. 1997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패했다.
1968년 제정된 '자활지도사업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근로구호의 대상자에게 우선적으로 무상 분배할 수 있다'고 돼있다. 그러나 해당 법의 시행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1982년 12월 이 법은 폐지됐다. 법적 근거가 없어 무상분배가 불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법원은 정부 손을 들어줬다.
박정희 정권 시절 자행된 '강제 노동'은 하루 아침에 없는 일이 됐다. 가분배 받은 황무지를 옥답으로 만든 피와 땀은 인정받지 못했다.
모월리에 개척단 출신은 11명 남았다. 다수의 개척단원들은 이 곳을 떠나며 가분배증을 다른 이에게 팔았다. 그렇게 소유권을 넘겨받아 정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 이전등기 청구' 소송에 참여한 사람은 250명 남짓. 이 가운데 직접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은 정씨 포함 16명 정도다.
"내 땅을 20년 외상으로...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강도짓 한겨"2013년 주민들은 결국 땅을 사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평당 5만~5만 5000원을 내라고 했다. 강제노동에 대한 인건비, 보상비는 전혀 책정되지 않았다. 정씨는 1억 4000여만 원을 20년에 나눠 갚아야 한다.
"인간 대우도 못 받고 새파란 청춘 바쳐 만든 땅을 그냥 뺏어갔어.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강도 짓 한 거야.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너무 억울해서...한이 맺혀가지고. 이렇게 죽도록 만든 땅을..."소싯적 부산을 누볐던 그는 땅 얘기가 나오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땅을 뺏긴 생각만 하면 그는 눈물부터 나왔다. 투덕투덕 마디마다 흙이 박힌 두터운 손으로 그는 연신 얼굴을 훔쳤다.
1년에 내야 할 땅값과 이자만 800만 원, 정씨는 돈이 없다. 한 해 꼬박 농사 지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300만~400만 원 남짓. 80kg짜리 쌀 한 가마니가 10만 원, 60~70가마니 수확해도 비료값, 기계값, 농약값을 제하고 나면 딱 반타작 남는다.
"그 돈 갚으려면 나보고 백 살 넘어서까지 농사 지으라는 거 아녀. 애들 모아놓고 이거 포기해야 쓰겠다 했더니 '아버지가 피땀 흘린 땅인데 값을 떠나서 아버지 명의로 사야 한다' 하더라고. 참 고맙지. 땅값은 애들이 나눠 내주고 있어. 내 땅을 20년 외상으로 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