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표지
이상출판사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를 쓴 작가 김은식은 인천 토박이다. 해태 타이거즈가 가장 잘나갔던 시기, 가장 약했던 인천 연고 팀-삼미슈퍼스타즈에서 청보핀토스를 거쳐 태평양 돌핀스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최약체 팀의 팬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인천 야구팬의 말, 타이거즈 팬심이 안 들어간 말이니 곧이곧대로 믿어도 된다.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단순한 '야구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가로지르는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 스포츠를 한 데 엮어서 살펴보는 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부터 1997년 외환위기 때까지 한국 사회의 정치 이야기를, 해태 타이거즈의 흥망성쇄와 연결지어 보여준다. 때때로 그 시절 해태의 영광과 몰락을 함께 한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를 소환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책속으로 들어가보자. 1980년대는 광주항쟁의 핏빛 역사로 문을 열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국민들의 관심에서 정치를 멀어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고등학교 때 달달 외운 3S 정책말이다. 당시 국민 소득이 2천 달러에 머물고 있었는데, 다시 말하자면 기업은 기업대로 프로스포츠를 상품화할 능력이 안 되었고, 국민은 국민대로 프로스포츠 따위에 쓸 돈이 없던 시절이었다.
서슬퍼런 권력자의 말 한마디로 시작한 프로야구 리그는 당연하게도 아주 부실했고, 특히 지역 구색 맞추기로 어거지로 참여한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야구는 원래 10명이 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식때 이름을 올린 선수는 14명이었다.
일주일에 딱 한 경기만 치르면 모를까, 야구는 날마다 경기를 해야 하는 스포츠고, 누군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대체할 선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타이거즈는 국가대표 김일권을 숙소에서 탈출시키고, 대학생 방수원을 자퇴시켜 팀에 합류하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어디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만 되겠는가. 모기업의 빵빵한 지원과 지역의 풍성한 야구 인프라로 우승을 밥 먹듯이 할 것만 같았던 삼성라이온즈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었다(1985년에는 전후기 우승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룰이었는데 삼성이 전후기 모두 우승을 하는 바람에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물론 삼성은 늘 강팀이었고 준우승 경력으로 따지자면 최고를 다툴 정도로 정상급 실력을 꾸준히 유지했다. 삼성이 콩라인을 타는 동안 우승을 밥 먹듯이 한 팀이 바로 해태 타이거즈다.
'1987년 우승 당시 한 일간지 우승 기념 광고. 1983년부터 1997년까지 15년 동안 해태 타이거즈는 무려 아홉 차례나 우승을 독식했다. 해태의 검정색 하의, 빨간색 상의 유니폼은 일명 '검빨 유니폼'이라고 불리며 타팀 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보통의 경우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를 보면 가장 부자 팀이 가장 인기가 많고 우승도 많이 한다. 뉴욕 양키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그 리그의 중심이자 자랑이다. 반면 기아가 지금이야 돈 많은 구단이지만, 해태 타이거즈는 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이었다.
스타플레이어의 연봉을 안 올려주기 위해 광주 물가가 서울 물가보다 싸다며 그렇기 때문에 연봉도 광주 물가에 맞춰서 내려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고, 너 연봉 1천만 원 올려주려면 해태 제과 공장에서 여공들이 껌 몇 통을 찍어야 하는지 아냐고 압박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책에서 다뤄진다.
그런 척박한 상황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보너스라도 받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고, 삼성이나 빙그레 선수들은 해태 선수들의 악바리 같은 기세를 한 번도 꺾을 수 없이 늘 2등에 만족해야 했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건 삼성만이 아니었다. 야구가 국민들의 혼을 쏙 빼놓기를 바라던 전두환의 바람 또한 헛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3명만 모여도 잡혀가던 시절, 그래서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좀 더 오랫동안 구호를 외치기 위해 높은 곳에 몸을 묶고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던 시절, 광주 무등경기장은 작가 말마따나 "수천 명이 모여 한 목소리로 외치고 흥분하고 울고 웃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곤봉과 최루탄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해태와 빙그레가 경기를 할 때면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갑지가 해태팬들이 빙그레 투수의 이름을 연호하곤 했다. 올 시즌 은퇴투어를 한 위대한 타자 이승엽도 다른 팀 팬들에게 그런 열성적인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을 거였고, 심지어 타이거즈의 선동렬이나 이종범도 그런 정도의 몸 터져라 외치는 외침을 받아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투수의 이름은 김대중. 성적으로는 구단 역사책 끄트머리에 이름 석 자 남기기도 어려운 평범한 투수였지만 그 이름 하나만으로 80, 90년대 무등 경기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물론 당시 팬들이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향팀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에 냅다 소리를 질렀을 것이고, 그 외침 속에는 알게 모르게 쌓인 정치적인 울분들, 당시만 해도 노골적이었던 지역 차별에 대한 분노, 감정이입한 지역의 유력 정치인 탄압에 대한 항의들이 담겨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곡은 듣기에도 처량하고 청승맞은 '목포의 눈물'이었다.
보통 응원가는 신나고 에너지 넘치기 마련이건만,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무등경기장 혹은 잠실야구장에 울려 퍼지는 목포의 눈물은 너무나 서러워서 우승팀에 대한 축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노래였다. 승리의 기쁨과 일상의 서러움이 만나, 그 자신들도 기쁨인지 슬픔이지 모를 눈물을 흘리며 떼창으로 부르는 노래였다. 작가 김은식은 해태 타이거즈를 이렇게 말한다.
"최강이었지만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이었으며 돈 앞에 무릎 꿇고 사는 이들의 가슴에 남겨진 야구팀." 약자들의 방식으로 싸워서 최강의 자리를 유지한 팀,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는 가장 슬픈 응원가를 가진 팀, 가장 가난했고 가장 소외된 지역을 연고로 했던 팀. 가장 많은 우승 횟수와 가장 많은 인기(타 팀 팬들의 야유가 들리는 것 같다)를 자랑하지만 가장 슬픈 역사를 가진 팀. 이 정도라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는데 해태는 정말 순식간에 몰락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은 1997년. 한국 사회가 외환위기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급속도로 빨려들어갈 무렵이었다.
1997년 즈음은 한국 사회가 여러 모로 크게 바뀌는 변곡점이다. H.O.T.가 등장했고 그 이후 가요계는 대형기획사에서 키워내는 아이돌 위주로 급속하게 재편되었다. IMF의 요구 사항에 따라 정부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리고 프로야구에서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선수 팔아 연명하다가 끝내 해체되었고, 해태 타이거즈 또한 모기업의 부도 속에서 기아에 매각되었다. 이 변화들은 모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