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이희훈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바쁜 리듬이 바뀌지 않으니 소소하게 사람들과 나눌 일상은 생기지 않았다. 한 달 한 번 회의 참석하는 것도 빠듯했다. 일상을 나누며 변화시키기에 내 속도는 턱없이 빨랐다. 가끔 참석한 회의에서 늘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 앞에서 학생들 복장 단속하는 문제로 엄마들과 12대 1로 설전을 벌인 일도 있었다. 그것도 카톡에서.
수학여행을 왜 영어마을로 가야하느냐, 아이들이 편하게 놀러 가면 안되느냐, 교복을 꼭 입혀야 하느냐…. 하는 말은 맞는지 모르겠으나 현실성은 없고 타인을 설득하기엔 실력과 신뢰를 갖추지 못했다. 밥 한끼 같이 못 먹도록 바쁜 주제에, 가끔 와서 하는 잔소리가 먹힐 턱이 없었다. 또는 불편한 식사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평범한 일상이라 불리는 것들과 마주하자 인권활동가는 한없이 작아졌다. 퇴각을 결정했다. 내 속도와 삶의 방식이 변하지 않는 한, 이번 시도는 실패라고 결론 지었다. 왜 이렇게 장황설이 늘어졌을까…. 허술함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일까.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권문제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인권 이슈가 발생한 사람들과 연대할 사회 시스템이 없을 때 생긴다. 국가와 사회가 기능하지 못할 때 벼랑 끝의 사람들은 구조 받지 못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시스템이 흔들려야 한다. 인권을 옹호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여전히 문제는 일상에 있다. 지금의 인권운동은 발생해버린 인권문제를 뒤쫓는 것만으로 급급하다. 내 활동의 태반이 그렇다. 그렇게 해서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인권활동가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또 도전할 생각이다. 어떻게 도전할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덤빌지는 아직 5년째 구상 중이긴 하지만. 해보지 않은 게 더 많으니 미래는 풍성하다.
"인간다운 삶 힘든 인권활동가…열 중 넷 '월급 100만원' 안돼" 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2015년이었다. 그 이후 불쌍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권이즈커밍' 기획에 불만이 많았다. '운동가가 존경은 못 받을망정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 그렇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아직도 배가 덜 고픈가 보네, 허세 쩐다. 그러시려나. 그러나 진심으로 그렇다.
'그들을 도와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들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 이야기' 들려주는 할머니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