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숙 4윤형숙 열사의 무덤이 이곳에 자리하기까지를 설명하는 윤치홍씨와 기자.
이윤옥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를 잘 모른다. 윤형숙 열사는 어렸을 때 안정리라는 마을에서 살아 안정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수피아여고 시절에는 윤혈녀라고 불렸다. 윤 열사는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적인 사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부터 5년 뒤인 1900년 9월 13일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윤 열사의 아버지 윤치운은 당시 한학자였으나 윤 열사가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어린 형숙에게 교육을 시키고자 아버지는 윤 열사를 순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집에 맡겨 초등학교를 마치게 한다.
이후 순천 성서학원을 이수한 뒤, 광주지역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에 진학하면서 나라의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키우게 된다. 당시 수피아여학교는 광주 숭실학교와 더불어 호남지역의 중요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학교이다. 1918년, 18살의 나이로 수피아여학교 신입생이 된 윤형숙 열사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반장을 도맡아했다고 한다.
특히 수피아여학교의 반일회(班日會)는 실제로 일제에 저항한 모임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윤형숙 열사는 '장발장', '베니스의 상인', '바보온달'같은 연극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다. 때마침 수피아여학교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박애순 선생(1896~1969,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있었고 영리하고 야무진 윤 열사는 박애순 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윤 열사가 2학년이 되던 1919년 1월 20일 오전 6시, 서울로부터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전해들은 수피아여학교는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박애순 선생은 3.1만세운동 전후의 국내 사정과 파리 만국강화회의 사정, <매일신보>에 실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 등을 학생들에게 알려 자신들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해야 하는 당의성을 이해시켜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