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백범기념관
한 눈만 뜨고 살라우리 속담에 "중매를 세 번 하면 천당 간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 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매라는 게 그만큼 하기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또한 상대를 서로 구제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대단히 소중한 일이라는 뜻이 포함된 말일 게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연찮게 중매를 세 건 성사시켰으며, 결혼 주례는 스무 번 이상 섰는데 주로 제자들이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내가 중매한 세 쌍도, 주례를 선 20여 쌍 부부도, 여태까지 헤어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참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간혹 그들로부터 식사 대접은 받은 적이 있지만 다행히 뺨을 맞은 적 없었다.
나는 중매를 하거나 주례를 할 때, 꼭 빠트리지 않고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한 눈만 뜨고 살라."곧 부부가 '서로의 장점만 보고 살아가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은 부부해로에 금과옥조와 같은 금언일 것이다. 내가 중매했거나 또는 주례를 한 부부는 대체로 이 말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기에, 그들 앞에 닥친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을 것이다. 아마도 내 말 때문에 도중에 헤어지는 일이 없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2005년 여름, 김구팀 자원봉사자였던 주태상, 이선옥씨가 미국 현지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래서 3차 방미 때는 이들 부부를 초대해 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 4차 방문 때는 그들 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이런저런 인연으로 볼 때 초대에 응하는 게 도리였다. 게다가 솔직히 나도 옛 정을 나누던 사람을 다시 만날 때는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처럼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초대 메일을 받은 그날, 나는 박유종 선생에게 가능한 식사는 바깥에서 하고, 그의 집에서 차만 한잔 나누자고 부탁드렸다. 이튿날 박 선생은 이선옥씨에게 그렇게 전했으나 이번만은 자기 집에서 저녁을 꼭 준비하겠다고, 당신은 이미 주소까지도 전달받았다고 했다.
그림 같은 집을 짓고사실 나의 4차 방문 일정은 짧았기에 시차 적응도 할 겨를 없이 도착 다음날 아침부터 곧장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로 출근해 문서 검색작업을 했다. 그렇게 나흘째 작업을 강행하자 눈도 아프고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팠다. 문서 검색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다. 검색 도중 틈틈이 NARA 경내를 산책해도 그때뿐이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박 선생은 약속 날짜인 목요일엔 자료 검색을 일찍 끝내고 그들 부부의 집으로 곧장 가자고 권했다. 그러면서 당신도 가능한 밤 운전을 피하고 싶다는 말씀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애초 약속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일을 마치고 NARA를 출발했다. 그들 집은 메릴랜드주 엘리코트시티에 있었는데, 박 선생은 초행길이지만 금방 집을 찾았다. 미국 주택들은 집 앞에 주소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기에 찾기 아주 편리했다.
그들의 집은 아주 훌륭했다. 그들 부부는 지난날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 노랫말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딸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던 이선옥씨가 차 소리를 듣고 후딱 뛰어나왔다. 그는 아이들과 남편은 학원에서, 직장에서 곧 돌아올 거라면서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다.
우리는 그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저녁준비를 하는 이선옥씨와 이런저런 정담을 나눴다. 나는 그때까지 잘 몰랐고,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두 분, 나를 만나기 전에 서로 알던 사이였나요?""아니에요, 선생님. 전혀 몰랐어요. 저희는 김구팀에서 처음 만났어요. 두 분(권중희 선생과 필자) 선생님이 귀국한 뒤, 어느 날 주태상씨가 저에게 슬쩍 골프를 가르쳐주겠다고 불러내더군요. … 그래서 … 그렇게 됐어요. 1년 후인 2005년에 결혼했어요."그렇다면 나는 이들 부부 만남에 간접 중매를 한 셈으로, 이들 부부는 결국 백범 선생님이 맺어준 천생배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혼한 지 12년 만에 이렇게 넓은 대지(2에이커라고 한다) 2층집에서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사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그들 부부에게 나는 중매쟁이로 저녁 한 끼는 대접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이선옥씨는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미국에 오실 때마다 저희 집에 꼭 오셔야 해요. 저흰 박 선생님,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백범 선생님을 평생 잊을 수가 없지요."콩나물국밥곧 주태상씨가 직장에서 돌아왔다. 10여 년 만에 만났지만 어제 본 듯 낯이 익었고 마치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우리는 악수만으로 부족해 서로 얼싸안았다. 이어서 학원에 갔던 딸 민지(13)와 승민(11)이도 돌아왔다.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모두 우리말이 유창했다. 나는 국어교사 티를 버리지 못하고 그 점을 칭찬하자 주태상씨는 아내의 공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동포 2세들 가운데 우리말과 우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취업도 더 잘 된다는 실용적인 이야기도 해줬다.
이선옥씨가 우리를 위해 애써 장만한 그날 저녁 메뉴는 '콩나물국밥'이었다. 거기다가 자기네 텃밭에서 손수 가꿨다는 풋고추 그리고 열무김치로 식단을 차렸다. 그동안 나는 출국 후 양식만 먹다가 콩나물국밥에 풋고추를 날된장에 찍어 먹자 속이 후련해졌다. 동행한 박 선생도 콩나물국밥 뚝배기의 국물까지 다 비운 뒤, 밥상에 남은 풋고추는 비닐봉지를 얻어 포장한 뒤 당신 주머니에 넣었다.
식사 후 나는 그들 부부와 차담을 나누면서 밥값으로 덕담을 했다.
"그동안 사느라 고생하셨소. 행복한 때일수록 더욱 겸손하시오. 그래야 행복이 오래 간답니다.""네, 선생님.""부부해로의 비결이오. 한 눈만 뜨고 사시오.""네, 선생님. 그 말씀 두고두고 명심하면서 살겠습니다."그들 부부는 마치 결혼 주례사를 듣는 것처럼 공손히 대답했다. 나와 박 선생은 그들과 차담을 나눈 뒤,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곧장 귀갓길에 올랐다.
이튿날 샌프란시스코 공항 대기실에서 인천행 환승 비행기를 타고자 10시간을 기다리면서 무료함을 잊고자 노트북을 꺼냈다. 그러자 아래와 같은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박도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만나 뵙게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두 분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나서 정말 아쉬운 마음이 매우 커서 혼났습니다.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은 아련합니다.조금 더 함께 하고 싶었지만, 박유종 선생님께서 밤길 운전하시는 것이 걱정되고, 또 박도 선생님도 너무 피곤한 시간대이기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저희 집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두 분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인가 다시 만날 날이 또 오겠지요? 저희 예쁘게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7년 10월 27일 이선옥 드림."나는 샌프란시스코 공항 대기실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들 두 부부의 건강과 백년해로를 빌었다. 하늘에 계신 백범 선생도, 권중희 선생도 그들 부부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고 반짝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