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미마을 정경팔오헌종택 앞 도로 위에서 본 바래미 아랫마을 정경. 기와집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김정봉
개암은 성주 사월에 살던 동강 김우옹(1540-1603)의 형이다. 바래미 마을에서 태어난 심산의 아버지 김호림은 개암의 12세손, 팔오헌의 8세손으로 1864년 23세 나이에 동강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300년 세월을 넘어, 수백 리 떨어진 성주로 입양을 간 것이다.
비록 심산이 동강의 13대 주손으로 성주에서 태어났지만 바래미는 본가와 같은 마을이었다. 심산은 바래미 사람들을 실질적인 혈족, 족친(族親)으로 여기며 깊은 애정을 나누었고 바래미 사람들은 심산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바래미 마을이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데는 심산의 역할이 컸으며 풍부한 재력과 유학에 기초한 통일된 의식, 역량 있는 인적 구성이 기반이 됐다. 마을이 생긴 이래 200년 동안 문과 17명, 사마시 수십 명에 달하는 인물이 배출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솟대 그늘에 우케도 못 말린다?예로부터 솟대가 많이 걸려 '솟대 그늘에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거나 '솟대 그늘에 우케(찧기 위해 말리는 벼)도 못 말린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떠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솟대는 마을 사람들이 급제를 하면 마을 입구에 높이 세운 장대를 말한다. 과장도 이런 과장이 있을까마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압축 업적'을 이루었으니 이런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마을은 윗마을 만회고택과 토향고택, 아랫마을 김건영가옥, 해와고택, 남호구택, 소강고택, 개암종택, 팔오헌종택이 동에서 서로 배(船) 모양처럼 길게 뻗어 있다. 독립운동을 벌인 김하림, 건영, 순영, 헌식, 창우, 뢰식, 창백, 창근, 홍기, 중문, 덕기, 창엽, 정진, 창신을 비롯해 바래미 마을 사람들이 긴박하게 움직인 고샅(시골의 좁은 골목)과 옛집들을 황소걸음으로 들여다 본다.
독립운동 기운이 가득한 만회고택봉화의 낮은 믿을 게 못 되지만 한낮은 무척 따사롭다. 햇살 좋은 날 만회고택을 찾았다. '국가유공자의 집' 표지판이 겸손하게 집안 내력을 알린다. 검게 바랜 춘양목 마루에 감들이 검붉게 익어 가는데, 색감 좋아하는 사진작가들에게는 발품이 아깝지 않을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