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1월 24일 서산개척단에서 발간한 '형설촌 안내'
형설촌안내 책자 갈무리
증언자들이 "돼지우리처럼 끔찍했다"라고 상기한 개척단의 생활상은 기사 속에선 유토피아였다. 갱생의 보금자리. 글만 놓고 보면 한 없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영치기 영차! 흙을 파헤쳐라' 사정없이 퍼붓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허허한 갯벌을 다지고 있는 800여 명 청소년들의 알찬 함성이 황해의 물결을 메아리치고 있다. (중략) 1만여 그루의 이탈리아 포플러가 감싸고 있는 이 녹원촌의 주인공들이 그날그날 누리는 의식주를 더듬어 본다." - <경향신문> 1963년 7월 22일 르포 '황해의 갯벌 다져 안주의 터전' 중"새로 태어난 어린이 32명 가운데는 사내아이가 29명이나 되어 '개척촌의 물이 좋다' '앞날의 좋은 징조'라는 등 좋아서 야단들이다." - <동아일보> 1964년 6월 15일 '피땀흘려 살쪄간다 보람찬 갱생' 중'녹원촌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성재용씨는 고아원에서 자라 기관의 권유에 서산개척단에 들어온 인물이다. 성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돌아간다면 서산으로 오겠느냐'는 질문에 "지금 생각한다면 절대 가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구속당하며 살았"고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었다"고 했다.
정영철씨는 민정식의 그늘을 벗어난 날을 '민주화 된 날'이라고 불렀다. 화장실을 갈 때도 2~3명씩 조를 짜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누군가 하나 도피하면 굴비 엮이듯 연좌제가 적용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성씨는 "도망가다 붙잡혀 골병 들어 죽은 사람 많이 봤다"라고 기억하기도 했다.
언론은 개척단원 모집도 직접 나섰다. <경향신문> 1963년 8월 16일의 독자 질의란에는 아래와 같은 답변이 소개돼 있었다. 당시 개척단원 백성옥씨가 쓴 수기 '나의 대열의 참가하라'를 보고 독자들이 참가 방법을 문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참가절차 = 아무런 절차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본사에 찾아오시면 본사는 청소년 개척단 민정식 단장과 협의하여 현지에 보내드립니다. (여비도 필요 없음)"백씨의 수기는 총 상·중·하 세 편으로, 백씨가 개척단에 내려와 "민 단장의 알선으로" 합동결혼하고, "알뜰한 보금자리"를 일구고 있다는 달콤한 광고였다. 마지막 편의 마무리는 이렇게 끝났다.
"이 수기를 읽고 백씨의 대열에 참가할 것을 희망하는 분은 본사 사회부에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이 수기를 읽고 언론사를 찾았다는 이들의 이야기도 게재됐다. 1963년 8월 2일자 기사다. 제목은 '개척의 길, 자원 10명 전과 9범 백성옥씨 수기에 감동의 메아리'였다. "백 형님의 뒤를 따라 새 길을 가보겠다" "아무래도 무슨 죄를 저지를 것 같아 죄 짓기 전에 백씨의 뒤를 따라 힘껏 일하겠다" 등 수기를 동력으로 한 개과천선이 이어졌다.
"우리 가정에 기약된 3천여 평의 옥토(간석지)" - 1963년 7월 31일 <경향신문> 백성옥 수기 연재 '나의 대열에 참가하라' 중 언론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었다. 개척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공범'이었다.
언론이 기록한 '기약된 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