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노조 한림대의료원지부 채수인 지부장
이희훈
노동조합(노조) 가입원서는 비밀리에 돌았다. 노조위원장을 포함해 조합원 5명이 주말 오후 병동을 돌며 가입원서를 나눠줬고 그렇게 퍼진 가입서는 밤을 틈타 위원장에게 돌아왔다. 일부 직원들은 사진을 찍어 제출하기도 했다. 그렇게 1800명이 가입했다.
지난 1일 출범한 한림대 성심병원 노조 이야기다. 병원 행사에서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장기자랑을 하게 하는 등 각종 갑질 사례가 폭로된 이후 한림대 성심의료원 산하 소재 성심병원(경기도 안양시 평촌신도시 소재)과 강남·동탄·한강성심병원을 중심으로 노조가 출범했다. 여론의 응원에 힘입어 탄생한 노조이지만, 노조 가입과 활동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했다.
지난 11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마주 앉은 채수인(43) 초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한림대학교의료원지부장은 병원 쪽의 압박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동탄 성심병원에서 부서장이 일대일 면담을 하면서 저희 노조에 가입하면 근무평가로 D를 주겠다는 등 압박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회사와 가까운) 기업 노조 가입서도 돌고요. 이 같은 부당노동행위 제보가 줄을 잇고 있어요."노조 탈퇴 회유·압박이 거세다보니, 채수인 지부장에게 조합원 보호는 최우선 과제다. 그래서 집행부와 조합원 명단은 비공개다. 노조 회의도 병원 앞에서 하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한두 정거장을 이동해 열었다. 한림대 성심병원은 평촌에 있지만, 노조 집행부는 과천에서 모여서 회의를 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할 때도 채수인 지부장만 얼굴을 드러냈고, 다른 조합원들은 '스크림 가면'을 썼다.
"보는 눈이 많다보니 지부장인 저랑 직원들이 병원에서 대화를 하거나 활동을 하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요. 저랑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너 노조 가입했냐'라는 말 들으니까요. 조합원들의 신상노출을 최대한 줄이는 게 제 임무 중 하나에요." 직장갑질119라는 터닝포인트성심병원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는 채수인 지부장의 삶은 지난 11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무엇보다 정신없이 바빠졌다. 영상의학과에서 2교대로 일하며 업무시간 외에 노조 업무를 하고 있다. 노조가 출범한 지 2주일도 안 되다보니 노조 사무실은커녕 노조 전임기간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근무가 끝나면 그때부터 노조 일을 해요. 그러다보니 퇴근시간이 자정을 넘기기 일쑤죠. 근 한 달간 가족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없네요."살도 많이 빠졌다면서 머쓱하게 웃는 채 지부장은 기자와 만난 11일도 휴가지만 노조 소식지를 돌리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이처럼 채 지부장이 쉬지도 못하고 노조 활동을 하는 건 절박함 때문이다.
채 지부장도 다른 직원들처럼 화상회의를 위해 3~6개월 동안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조기출근은 물론 주말 재단행사에 차출되기도 했다.
연차가 쌓여가면서 자괴감은 커졌다. 직급이 오르면 병원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쉽지 않았다. 특히 조직 전체가 관여하는 재단행사 참여라던가, 화상회의, 미사용 연차수당 미지급 등은 손도 댈 수 없었다. 관행이라는 말로 벌어지는 악질적인 행태들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 빛은 노조였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에서 지난 2011년 노조가 결성됐지만 한 달이 안 돼, 유명무실해졌다. 병원의 방해 작전으로 와해됐기 때문이다.
"춘천에서 노조가 생기니 다른 성심병원에도 노조가 금방 생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춘천 노조 활동을 유심히 지켜봤죠. 그런데 병원에서 직장 노조를 만들어 영상의학과 출신 지부장을 내더라고요. 기존 노조 지부장도 영상의학과 출신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영상의학과는 물론 노조까지 다 와해됐죠. 200명 정도 됐던 춘천 노조가 한 달 만에 10명밖에 안 남았어요."절망했다. 그런 그에게 직장갑질119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지난달 1일 직장갑질119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와 동료들은 너도나도 직장갑질119에 문을 두드렸다. 한림대 성심의료원 직원들은 그간의 불만을 표출했다. 표출된 분노는 기사로 이어졌고 한림대 성심병원과 갑질은 연관 검색어가 됐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라는 절박함은 노조 결성의 원동력이 됐다. 채 지부장은 "지금처럼 여론, 언론, 정부가 병원 일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면, 우리 목소리를 병원에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