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벽당종택 소나무가 빼곡한 뒷산을 배경으로 그윽하게 자리 잡았다. 솟을대문 뒤에 사랑채, 사랑채를 중심으로 왼쪽에 안채, 오른쪽에 쌍벽당, 쌍벽당 뒤에 사당이 있다.
김정봉
내거촌 입향조는 김균(1484-?)이다. 김균의 아버지 담암 김용석(1453-1523)은 무오사화를 피해 안동 풍천면 구담으로 낙향하였다. 무오사화를 보고 '진사는 몰라도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1505년경, 김균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거촌으로 들어왔다. 장인(丈人), 봉화금씨 금계(1439-1497)의 권유가 있었다.
김균이 잡은 터는 산세는 좋으나 뒷산의 기가 약하고 주변에 물이 없는 곳이었다. '물이 없으면 벼슬자리가 없다'는 속설이 있다. 굳이 이런 터를 잡은 이유는 뭘까. 벼슬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김균의 맏아들, 쌍벽당 김언구(1507-?)도 생원시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을 접고 소나무와 대나무, '쌍벽(雙碧)'을 벗으로 삼으며 선비의 길을 걸었다.
광산김씨 종택, 쌍벽당종택마을은 어수선하다. '전통마을 관광자원화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란다. 어수선한 골목을 지나 쌍벽당종택에 들었다. 산 아래에 있는 그윽한 집이다. '벼슬 못하는 자리'라는 말이 거짓말로 들릴 정도로 아름답다.
내 뒤를 급히 쫓아온 사람이 있었다. 18세손 김두순 종손이었다. 종손은 내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멀리서 부리나케 쫓아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