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권우성
그날- 용산철거민 학살 추모 9주기에 바쳐그날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발끝부터 화형당하던 그날가난한 이들의 비명소리조차 진압당하던 그날통곡도 절규도 경악도 수갑에 채워지던그날다섯 명의 전태일이 다시 한꺼번에 불태워지던그날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이 다시 옥상으로 내몰리던그날누군가가 다시 고문당하고 의문사 당하던 그날중앙정보부 안가 7층에서 최종길이 다시 내던져지던 그날신민당사 옥상에서 김경숙이 다시 뛰어내리던그날신흥정밀 옥상으로 내몰린 박영진의 몸에 다시 불길이 타오르던 그날안양병원 옥상에서 다시 박창수가 내던져지던그날부정투표함을 지키던 구로구청 옥상에서 다시 사람들이 뛰어내리던그날접근금지의 비무장지대에서천만 비정규직들이 이천 이백만 노동자 가족들이오백만 도시빈민들이 이백만 청년실업자들이 백만 이주노동자들이오십만 장애인들이 다시 길 잃은 난민으로, 국외자로 몰리던
그날재벌들의 앞날이 환해지던 그날모든 금수저 특권층 대주주 가족들의 저녁이 풍성해지던그날고위 관료들의 미래가 더욱 안전해지던그날부패한 정치인들의 차기 차차기가 밝게 점쳐지던그날진압책임자가 학살책임자의 총애를 받아일본총영사로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등극하던 그날그날들을 잊을 수가 없다아직도 어디에선가 불태워지는 가난한 자들의 절망을오늘도 어디에선가 생의 주소지를 잃고 헤매는 이들의 막막함을오늘도 헬조선의 비애를 숙명처럼 살아가야 하는 모든 흙수저 N포세대 인생들의 가녀린 소망들을 잊을 수가 없다그 모든 생의 아픔 곁에서오늘도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갈 곳 잃고 서성이는 다섯 철거민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철거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저들의 무한한 독점과 탐욕이라는 것을진압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저들 소수의 권력과 특권이라는 것을잊을 수가 없다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언젠가는 꼭 이루고 말리라 약속하며눈물로 떠나 왔던 남일당 건물 위 파란 망루를다른 꿈을 꾸는 이들의 작은 꼬뮌이었던 레아를작은 광주였던 그곳을작은 1987이었던 그곳을작은 7.8.9였던 그곳을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곳에 남겨두고 온 나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다오후 내내 몽롱한 상태에서 보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더 외롭고 가난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너무 많은 말들과 갈등과 욕망들에 노출되어 있어서인지 뱃속이라도 비우고 싶었으리라.
며칠 잠을 설친 탓도 있어서였을까. 고작 세 끼 굶은 것인데도 저물 무렵이 되자 나른한 정신이 허공으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목디스크 증상으로 몇 달째 먹고 있는 '아편성 진통제'로도 느껴보지 못했던 몽롱함이 고단한 현실로부터 내 영혼을 떼어내 위무라도 해주는 듯, 과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느 순간 밀려드는 졸음까지도 달콤. 까무룩하니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간. 모두가 가고 난 사무실의 투명한 적막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쯤이나 나의 영혼은, 우리는 삶의 감미로움과 평온과 고요를 얻을 수 있을까.
괜한 상념을 접고, 9년 전 용산 참사 현장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야 했다. 날이 밝으면 추모시 한 편을 다시 출력해 가슴에 담고 마석 모란공원으로 가야 하는 날.
굳이 지금 와서 용산 철거민 참사의 내막과 의미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날 새벽 남일당 위 파란 망루 안에서 잠시 일렁이다 이내 거대한 불기둥으로 솟던 발화의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서울시장 시절 서울 전역 서민 주거지 100여 곳을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 건설 지역으로 허가해 일부 자산가들과 투기 건설자본의 먹이를 만들어주고, 대통령 재임 시절 용산4가에서 철거민들의 첫 저항이 발생하자 발빠르게 대터러 진압부대를 투입해 신속하게 망루를 진압하게 했던 이명박을 역사의 법정에 꼭 세워야 한다는 말은 적지 않을 수 없다.
그 재빠른 진압의 노고를 인정받아 일본총영사로,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이제 다시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행세하고 있는 전임 서울경찰청장 김석기에 대해 분명히 단죄해야 한다는 분노의 말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