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반에 남편이나 시동생을 설거지에 동참시키려 하면 어머님은 재빨리 아들들만 따로 모아 어린이집 원아들처럼 낮잠을 재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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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반에 남편이나 시동생을 설거지에 동참시키려 하면 어머님은 재빨리 아들들만 따로 모아 어린이집 원아들처럼 낮잠을 재우셨다. 진짜 잠들지는 못한 아들들은 끝도 없던 설거지가 끝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설거지를 원천봉쇄 하신 것이다.
내가 남편을 불러달라 하면 어머니는 '○○ 잔다'라고 대신 말씀하셨다. 어쩌다 아들들이 하려고 해도 어머니가 강력하게 막으셨다. 더러는 작은 어머님까지 나서서는 '그 꼴은 못 본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만다. 그게 뭐 일이라고 남자를 시켜' 하시면서 고무장갑을 낚아채시기도 했다.
결혼 5년 만에 며느리들끼리 의기투합하여 친정 가는 길이 겨우 열렸을 때도, 어머니는 어떻게든 늦게 보내시려고 시간을 끄셨다. '차 막히니 한숨 자고 밤에 가라'라든가, 아들에게 술을 여러 잔 먹여서 운전 불능 상태를 만드신다거나, 시동 걸고 대기 중인 차 앞에서 '텃밭에 야채를 뽑아가라'처럼 시간이 필요한 일들을 거듭 주문하시면서….
그렇게 출발해도 친정 도착하면 저녁 먹고 자는 게 전부인데, 그 명절의 자투리 시간조차도 당신의 집에 머물게 하셨다. 어머니가 며느리였을 때는 친정가는 것을 꿈도 못 꾸던 일이라서? 딸이 없으셔서? 아님 아들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으셔서?
드러내지 못하고 곪아온 시간들이 부부관계를 삭막하게 하고 시댁에 대한 반감으로 번지기도 했으며, 명절이 끝나면 몇 달이고 시댁에 가지 않고 안부전화조차 내키지 않던 시간들이 쌓인 채 지내기도 했다.
20년을 지나오면서 자잘한 투쟁을 거치고 거쳐서, 그리고 서로간의 양보와 이해를 거듭해가면서 아주 조금씩은 변화들이 생겼다. 일부러 시간을 끌어서 출발을 늦추는 어머니의 방법에 아들 며느리가 좀 더 단호하게 대처했고, 어머니도 부질없는 실랑이를 조금은 줄이셨다.
아주 가끔은 성인이 된 남자조카가 같이 전을 부치고, 새우나 고기 굽기 같은 간단한 조리 과정에는 아들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절 음식 중 어머니 전문분야는 미리 해두시는 것도 많아졌다. 아들들만 낮잠을 따로 재우는 희한한 풍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큰 아주버님은 미리 오셔서 집안 청소를 다 해두시기도 한다. 그밖에 수리하기, 옮기기 등등의 다른 일들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아버님은 평상시에도 마늘 까기, 파 손질하기, 콩 껍질 벗기기 등을 말없이 해 두시고, 특히 사골국은 아버님이 거의 매번 끓이신다. 완벽하지도 동등하지도 않기에 부단히 노력중이지만 농사가 가업인, 그래서 며느리가 일꾼인 게 당연시 되어 온 이 집안으로선 작지만 큰 변화들이 소소하게 진행중이다.
어머님의 '명분'에 동원되어 온 며느리들하지만 20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희한한 일정 하나가 있다. 초대받은 자들에겐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없어져야,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되는 시간. 바로 명절 점심 때 들이닥치는 '친척'들의 방문이다.
'친척'이라는 단어 안에는 아버님의 친동생들인 작은아버님들과 그들의 배우자인 작은어머님들, 이 분들의 아들과 그 배우자, 그 사이에 생긴 손자 손녀들이 들어있다. 아주 가끔은 아버님의 여동생인 고모님의 가족, 어머님의 여동생인 이모님 가족도 포함된다.
어머니의 큰 동서인 큰어머니가 차례지낸 집안 남자들을 다시 불러 먹이던 좀 더 먼 과거에도, 나의 어머니는 2차처럼 이분들을 다시 집으로 오게 해서는 며느리들로 하여금 밥상 같은 술상을 차리게 한 뒤, 오후 늦도록 머물게 하셨다. 정작 큰어머니가 이 일을 그만 두신 뒤에도 어머니의 상차리기는 계속되었고, 심지어 진화하였다. 잔칫상 같은 밥상을 차려내도록 며느리들에게 주문하신 것이다.
설 전날 도착해서 설음식을 만들고 먹고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하느라 이미 지친 상태에서 며느리인 나의 설날은 시작된다.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 뭔가 쏟아지고 부딪히는 소리,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 손위형님을 부르시는 소리…. 부엌 쪽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들은 며느리인 나를 깨우는 알람이다. 어머니는 지금 차례음식을 챙기시는 중이다.
넉넉히 30분 정도면 챙길 수 있는 일이고, 전날 재워둔 고기산적은 10여분이면 익을 것이고, 모든 차례준비물은 부엌 반경 2m 안에 다 준비되어 있는데도 어머니는 오래오래 챙기신다. 그것도 새벽부터.
그래서 며느리들도 부엌에 일찍나와 사소한 심부름 하나에라도 바로 투입될 수 있게 대기상태로 있게 만드신다. 늦잠을 잘 수도, 가족끼리 대화를 할 수도, 휴식을 취할 수도, 맑은 시골공기를 마실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며느리에게 그런 평화로운 설날 아침은 없다.
빨리하면 20분 만에도 끝낼 수 있는 일을 3시간에 걸쳐 하신 다음엔 '지금 상을 차려 둬라. 오자마자 작은 아버님들 드실 수 있게'라는 말씀을 남기신 뒤, 이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가족묘지를 향해 떠나신다.
방귀 뀌고 담배 피우는데 밥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