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길 오른 평양 어린이,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22] 피란 (1)

등록 2018.03.02 20:04수정 2018.03.0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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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22회와 23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 한국전쟁 사진 가운데 '피란'이라는 주제로 골라 게재한다. 여기에 한국 전쟁문학의 대가 김원일 선생이 그 당시 누나와 함께 서울에서 고향 진영으로 피란 간 이야기를 2회에 걸처 (저자 승낙하에) 싣는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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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4. 지붕 없는 무개 열차에 몰려든 피란민들. ⓒ NARA


지붕 없는 무개화차

우리 식구는 왕십리 어느 집 문간방에서 10월 하순까지 (인공치하 서울생활을) 견뎌냈다. 충무로 집에서 가져온 옷가지 등 지닌 물건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양식을 조달했다. 동사무소와 청년방위대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두고 어디에서 살다가 왔냐며 뒤를 캐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더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환고향(고향에 돌아가기)을 결정했다.

전선은 북쪽으로 멀리 올라갔고 추위가 닥쳐오고 있었다. 누나와 내가 먼저 길을 나서기로 했다. 옷을 두터이 입고, 주먹밥을 싸서 들고 서울역으로 나섰다. 서울역 광장은 난장판이었다. 수복된 서울로 올라오는 피란민, 인공치하 석 달을 서울서 살아남아 뒤늦게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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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열차에 몰려든 피란민들. ⓒ NARA


서울역에 도착한 기차에는 지붕 위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타고 있었다. 누나와 나는 만리동 쪽으로 빠져 개구멍을 통해 역 구내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노천에서 새우잠을 잔 끝에 하행하는 (뚜껑 없는) 무개차에 올랐다. 피란민들로 발 딛을 틈도 없었다. 이윽고 기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검은 연기를 토하며 기차는 칙칙폭폭 아주 느린 속도로 달리다 쉬다 했다. 철로가 끊어진 지점이나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는 몇 시간 보수를 하고 다시 출발했다. 사람들은 기차가 정거한 틈을 이용해 무개차에서 내려 용변을 보거나 개울을 찾아나서 지닌 물통에 물을 길어왔고, 주위의 밭에서 버려진 배춧잎이나 무 뿌리를 캐내 오기도 했다.

그러다 기차가 기적 한 번 울리곤 털컹하며 갑자가 출발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되어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차에서 내린 식구를 놓치는 가구도 있었다. 애통하는 가족에게 옆 사람이, 명이 길면 어디서든 살겠고, 입 하나 덜지 않았냐며 위로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농사조차 짓지 못한 들판은 황량했고, 더러 길가에 버려져 있는 시신을 보기도 했다. 한데라 밤이면 추위가 살을 저몄다. 누울 자리조차 없으니 누나와 나는 꼭 안고 하늘에 뜬 별빛을 바라보며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났다. (다음 회에 이어짐) -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발간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4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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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6. 수원 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란민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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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3. 인천역 플랫폼에서 남행열차를 타고자 몰려든 피란민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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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3. 평양, 피란민 행렬 속의 한 어린이.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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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1. 평양 근교, 중국군 참전으로 유엔군의 후퇴 행렬. 민간 피란민은 논길이나 밭길로 남하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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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11. 북한 주민들이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넘어 남하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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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27.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피란민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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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강추위 속에 끝없이 이어진 1.4 후퇴 피란행렬, 피란민들은 봇짐을 지거나 달구지에 싣고 서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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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2. 8. 부산항에서 남해안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피란민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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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3. 인천역 플랫폼에서 남행열차를 타고자 몰려든 피란민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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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15. 남해 바닷가에서 피란민들이 섬으로 가고자 미 해군 상륙함(LST)을 기다리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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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2. 8. 피란지 부산에서 다시 남해안 섬으로 가는 배를 타고자 기다리는 수녀님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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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8. 훈련소로 가는 징집대상자들의 침묵 행렬.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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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인천시민들이 피란선에 오르고자 부두로 가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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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8. 강릉, 눈길 속에 피란민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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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3. 1. 전주, 노인 부부가 어린 손자를 앞세우고 피란길에 나서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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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5. 29. 서울,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로 시민들이 세 번째 피란봇짐을 꾸려서 뗏목으로 엮어 만든 한강 부교를 건너고 있다. ⓒ NARA


덧붙이는 글 -알림-
박도 엮음『미군정 3년사』및『한국전쟁 〮Ⅱ』수록 사진전
일시 : 2018. 2. 11. ~3. 31. 오후 1시~9시
장소: 경북 구미시 삼일문고 전시장 (문의 054-453-0031)
편저자와의 대화 : 2018. 3. 10(토). 오후3시
#한국전쟁 #피란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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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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