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민예품인 반닫이
손안나
2천원의 입장료가 있는데 완주군민은 50%가 할인되어 천원으로 입장하였다. 1층 로비에는 장석으로 장식된 반닫이가 진열되어 있었다. '술 테마 박물관인데 반닫이를 왜 진열해 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침 박물관 나상용 학예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렇구나!' 끄덕이게 되었다.
나상용 학예사에 의하면 술은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민속과 민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술 박물관에는 술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과 함께 민속품과 민예품들이 수집되어있다고 한다.
1층 로비에는 반닫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서민들의 일상용품인 반닫이는 '반쪽을 열었다, 닫았다'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닫이는 장석으로 여러 문양을 만들어 장식하고 있는데 이 문양은 하나하나 소원과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호리병은 도교의 신선들이 약을 담아 가지고 다니며 환자를 치료하였던 도구이기에 무병장수의 기원과 호리병을 만드는 호로박에는 씨가 많아 자손번성의 의미도 있다. 거북은 장수, 잉어는 등용문 고사에 근거한 장원급제의 염원을 담았고 박쥐는 중국어로 발음하면 '복'이다. 이처럼 장식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를 담아 만들어 붙였다.
3층에 있는 수장고형 유물전시관은 박물관의 수장고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음에 착안하여 전시실을 수장고처럼 꾸며 관람객들에게 수장고가 어떠한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곳에는 5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글이 쓰여 있는 항아리이다.
글씨는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주세를 걷기 위해 표시해 놓은 글씨이다. '항아리 하나에 세금 얼마' 이런 식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 일본의 통감정치시절 조선의 식민지 통치를 준비하였다. 가장 먼저 우리의 자원과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서 일본 사람들은 식민통치를 위한 재원을 주세에서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술을 마셨고 소비량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1909년의 주세법에 의하면 술을 만드는 사람은 영업장은 물론이고 집에서 먹기 위해 만들어도 면허를 받아야 했다. 영업장의 면허는 상속이 가능하였지만 개인의 면허는 상속할 수 없었다. 거기다 영업장의 세율보다 개인에게 부과한 세율이 훨씬 높았다. 결과는 1916년 30만 명이던 가양주 주조자가 1930년대에는 10명으로 줄었다.
집에서 만드는 술을 가양주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술은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빚었다. '명가명주(明家銘酒- 이름 있는 집안의 술이 맛있는 술이라는 뜻)'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술은 지방에 따라, 가문에 따라, 빚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맛과 향기가 다른 가양주들이 만들어졌다. 이름 있는 집에서는 가양주를 만들어서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등 집안행사를 치렀다.
이러한 가양주들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위기를 맞았고 해방 이후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쌀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가양주들이 사라지게 된다. 1980년대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면서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관광콘텐츠로 발전하여 많은 지역에서 전통주가 복원되게 된다. 항아리 하나에서 우리의 역사와 술의 역사를 만난다.
반대편 벽면에는 수많은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시선을 잡아끈 것은 빨간 두꺼비이다. 지금은 참이슬이라 이름을 바뀌었지만 예전엔 진로였다. 진로소주는 1924년 평남 용강군의 '진천양조상회'가 모체이다. 이때 소주의 도수는 35도였고 트레이드마크도 원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