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수돗물을 자유롭게 쓰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심각한 물 부족 국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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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수돗물을 자유롭게 쓰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심각한 물 부족 국가 중 하나다. 옛 기사를 보면 정말 그렇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상수도를 통해 각 가정에 물이 공급되기 전까지 특히 여름철이면 물 부족이 심각했다.
<몇 달 동안의 한발로 인하여 공동우물이 고갈하여 일대 물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광주 시내 공동우물은 260개소인데 그 중 90개소가 고갈하여 주부들의 아우성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동아일보 1955.5.19.<우물물에 의존하는 삼양지구를 보면 전 가족이 동원되어 물을 찾아 헤매다 고지대 주민들은 물 한 지게를 겨우 얻는 실정이고 깊이 5미터 되는 산마루 향나무 우물이라는 이름 있는 수원도 바닥이 드러날 정도다. 변두리 식수난에 깜짝 놀란 서울시는 지난 15일부터 소방차 다섯 대를 동원, 급수 작전을 폈지만 이 물 얻기에 주민들이 아우성이다.> 경향신문 1965.05.26.서울 지역은 한강을 수원으로 해 물 부족이 덜했지만 서울 주변 지역은 1950~1970년대 동안 거의 매해 가뭄에 시달렸다. 너도 나도 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는 이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이 틈에 앉아서 돈 버는 사람도 생겼다. 가뭄소동으로 홍제동 논골약수터 주인 신봉원 여인은 약수물 한 지게에 2원씩 받고 하루 종일 팔아 수입이 만만치 않다고. 돈 있는 주민들의 물은 이 약수터가 대었다. (중략) 돈 있는 사람은 그나마 물을 사먹지만 산꼭대기에 사는 많은 주민들은 한 달에 20~30원씩 내고 비위생적인 펌프 물을 얻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다.> 경향신문 1965.6.2.1970년에도 '식수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 부족이 심각했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으려고 밤샘을 하는가 하면 몇 백 미터 씩 물통이 줄을 이었다. 개인 소유의 우물에서 물 한 지게의 가격은 50원으로 껑충 뛰었다. (경향신문 1970.6.16.)
급기야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울의 어느 집 마당에 수돗물을 길러 온 이웃 주민과 집주인의 아들이 말다툼을 벌이다 이를 말리던 집주인을 밀어 뇌진탕으로 숨지게 했다. 당시 그 일대에서 수도가 놓인 곳은 그 집뿐이었다. 물이 나오는 집도 그 집이 유일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며칠 동안 이 수도를 이용해오던 중 어느 주민이 물을 받으러 오자 집주인 아들이 "돈 주고 수도를 놓은 사람도 제대로 물을 못 먹는데 왜 자꾸 와서 귀찮게 구느냐"고 말을 한 것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결국 물을 얻으러 왔던 주민은 폭행치사혐의로 구속이 되고 말았다. (경향신문 1970.6.1.)
우물에서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1981년 상수도 급수율이 57퍼센트를 달성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지역에선 우물을 이용했다. 두레박을 대신해 펌프를 달면 힘을 덜 들이고도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우물가는 주부들이 모여 일하며 정담을 나누는 장소였지만 으스스한 사고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선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물을 파다가 흙벽이 무너져 매장당하거나 (경향신문 1955.09.28.) 발을 잘못 디뎌 실족사 하거나 (동아일보 1962.08.18.) 동네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우물에 석유를 쏟아 붓거나(경향신문 1955.2.22.) 친구를 죽여 우물에 빠트리기도 했다.(동아일보 1957.11.15.)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1952년 9월 25일 동아일보에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있던 한 여성이 두 아이와 함께 세상을 뜨기로 마음을 먹고 여덟 살 된 아이를 먼저 우물에 던졌다. 남은 아이를 잡으려는 순간, 아홉 살인 아이가 "엄마, 밥 달라고 않을 테니 우물에 빠트리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결국 아이를 안고 우물가에 쓰러져 실신했다. 이 기사는 "어린 생에 대한 애원이 세상을 울리고 있다"며 당시 농촌의 식량난이 심각했음을 알리는 일화로 소개되었다. (동아일보 1952.9.25.)
몹시 안타깝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다. 2014년 송파 세 모녀가 생활고로 고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최근엔 증평에서도 어렵게 생활해가던 모녀가 숨졌다. 6.25전쟁 시기에 벌어진 일이 국민소득 몇 만 불을 바라보는 시대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난감하다.
이런 영향인지 가까이 있으면 편리한 우물을 집집마다 파기를 꺼리기도 했다. 1965년 5월 29일 경향신문엔 전북에 사는 한 주부가 신문사에 기고한 글이 실렸다.
<어디든지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솟는다는 이 마을에 50여 가구 가운데 단 한 집도 자가용 우물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 하나의 공동우물을 사용하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집안에 샘이 있으면 귀신이 나온다"는 미신 때문이란다. (중략) 문제는 공동우물이 음료수로 쓰기에 얼마나 비위생적인가 하는 점에 있다. 우물이 깊고 넓고 바가지로 뜰 수 있는 것까지는 좋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위생관념도 없이 함부로 쓰기 때문에 지푸라기나 채소 나부랑이가 떠도는 것은 오히려 약과요 요강이나 기저귀 같은 것을 예사로 들고 온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집안에 펌프나 우물을 마련하기 전엔 먹은 음식이 살로 가지 않을 것만 같다.>우물은 수질과 위생상태가 늘 문제였다. 같은 우물물을 먹는 동네 주민들이 집단으로 장티푸스나 이질에 걸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특히 장마가 지나간 뒤엔 나라에서 우물을 소독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만큼 심각했다.
소독법으로는 클로르칼키(차아염소산칼슘)라 부르던 염소소독제를 우물이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소독을 한다고 해서 수질까지 좋아질 리 없었다. 1969년엔 식용으로 부적함 판정을 받은 공동우물 3000여 개를 완전 폐쇄하기도 했다.
일본인을 위한 수도시설, 그마저 6.25로 파괴돼우리나라에 처음 수도가 놓인 것은 대한제국기인 1908년이다. 서울의 4대문 안과 용산 일대에 식수를 공급하는 공용수도였다. 물장사들이 물을 받아 집집마다 배달하고 물 사용료를 받으면 일부를 상수도 회사에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수도를 설치했지만 이는 일본인 이주자를 위한 것이어서 한국인은 거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6.25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전쟁 직후 산업화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도시로 인구가 물밀 듯 들어왔다. 우물로는 식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도시민들에게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물로 옮기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상수도 시설확충이 시급했다.
그러나 대규모 상수도 시설을 지을 여력이 없어 결국 외국의 원조를 받았다. 이후 상수도를 통한 급수율은 1960년에는 22%, 1971년에는 36%(144개 도시 1,160만 명), 1976년에는 56%, 1981년에는 57%가 되었다. 2014년 우리나라의 상수도 보급률은 98% 이상이다. (출처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70년 - 상수도>
내가 버린 물의 행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