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표지
마음산책
'사전'을 타이틀로 내세웠듯이 '자음'과 '모음' 순으로 정리했다. 대부분 한 글자 명사이지만 체언 앞이나 뒤에 붙어 특유의 성격을 지어주는 단어도 실렸다. 감탄사, 의성어, 의태어도 포함해서. 글자 순이라 픽션이나 논픽션처럼 기승전결이 있는 구조는 아니다. 다만 저자가 정의(定義) 내린 내용을 여러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고 시인이 가진 비판의 정서도 읽을 수 있다.
'사전(事典)'은 말에 관한 사회적 약속이다. 권위를 빌려 정의(定義)하고 시민들이 그 책의 약속을 따르게 만든다. 이러한 권위를 빌린 사회적 약속을 시인은 살짝 비튼다. 국어사전에서 '한자(漢字)'가 다르면 전혀 다른 단어가 되지만 <한 글자 사전>에서는 한글로 썼을 때 같은 단어를 하나로 묶어 문장으로 설명했다. "남"처럼. '남자'이기도 '타인'이기도 하지만 때론 남쪽을 의미하는 한 글자 '남'으로. 뜻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 의미가 주는 공통점을 "멀리 두고 보아야 좋다"라며 시인다운 설명으로 맺는다.
사전의 형식을 갖춘 책이지만 딱딱하지 않고 유려하다. 시처럼 '운'과 '율'이 있다. 시인이라서 그럴까? 그래서 글 처음에 언급했던 책을 쓴 저자가 "시인이 쓴 산문을 고르면 실망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글 읽는 재미가 있고 맛난 표현을 찾는 즐거움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식당이 알고 보니 숨겨진 맛집인 것처럼.
'한' 단어를 시인의 관점에서 정리한 뜻을 하나의 문장이나 짧은 문단으로 때로는 시나 수필의 형식으로 담았다. 대개 짧은 글이지만 '한' 글자에서 뽑아내는 사유의 깊이가 깊다. 필요할 때는 다른 문인의 작품에서 끌어오면서 그 깊이를 더 깊게 만들려 한다.
단어가 소유한 뜻보다는 풍기는 의미로
<한 글자 사전>에 나온 단어 대부분을 문자 원래의 뜻은 물론 풍기는 의미를 추가하여 서술했다. 얼굴 부위나 동물 그리고 분비물처럼 평소 친숙한 단어들로 예를 들 수 있다.
'귀'의 경우는 "토론할 때는 닫혀 있다가 칭찬할 때는 잘 열리는" 기관으로 '입'은 "인간의 가장 간악한 신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생물학적 기능 외에 사회적 기능을 추가하여 은유했다. '닭'은 "좋게 비유된 적이 거의 없는 동물"로, '소'는 죽을 때까지 부리고 남김없이 먹어버리면서 "경은 왜 읽어줄까?"라는 식으로 인간이 부여한 정체성으로 동물을 표현했다.
인간의 분비물인 '똥'이나 '침'을 몸 안에 있을 때와 몸 밖에 나올 때를 비교하여 정의했다. 내보는 순간 쾌락이 있다는 의미에서 '말'과 '똥'이 같고, '침'을 매일 삼키면서도 뱉으면 더러워 보이는 분비물이 가진 이중성, 사람들이 분비물을 바라보는 이중성을 시인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역설적 은유도 돋보인다. '멍'이 아름다운 이유가 그 색깔이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등 절반 이상이 무지개"의 색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며 폭력 혹은 부상의 결과를 시각적 역설로 표현했다. '옥'은 "보석이자 감옥이자 집"이라는 극과 극의 가치로 옮겨 가며 '옥'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단어가 가진 의외의 뜻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링'은 동그라미지만 '복서에게는 사각'을 의미하고. '윷'은 "팔십 대 노인과 여덟 살 꼬마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이면서도 공정하고 팽팽한 게임이라고 했다. 맞는 얘기다. 사각의 링이라는 말에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았고 명절마다 3대가 모여 윷놀이했으면서도 공정하고 팽팽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인간을 풍자하며 비판인간을 동식물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잎'을 설명하며 "식물을 구분할 때 꽃보다는 잎을 보고 구분"하는 것처럼 사람도 "얼굴보다는 '손'을 보고 구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이 단어처럼 자연이 쌓아온 섭리가 진리에 가깝다는 의미로 설명한 단어들이 많다.
'탕'을 "동물의 살점이 들어간 국"으로, 사람의 경우에는 "물에 몸을 푹 담그는 곳"으로 표현했다. 고깃국과 목욕탕이라는 시각적 비교를 했지만, 사람이 도살한 동물로 요리한 모습과 그 반대의 모습을 은유한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인 설명이다. 이렇듯 사람의 모습과 동식물의 상태를 서로 치환하여 풍자한 단어들이 많다.
이기적 모습을 보여주는 단어도 있다. '더'의 경우 남에게 요구하면 "가혹한 것"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면 "치열한 것"으로 표현했고. '통'의 경우 "내 가족이 통이 큰 건 불안"하고 "내 친구가 통이 큰 건 든든"하다고 표현했다. 요즘 유행하는 문장 "내로남불"이 생각나게 한 단어들이다. 이렇듯 나와 타인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를 선택해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한자(漢字)로는 다른 뜻을 가졌지만, 한글로 썼을 때 글자가 같아서 생기는 중의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했다. '배'의 경우 같은 배에 함께 탄 "타인을 라이벌로 간주"하는데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라고 서술했다. 같은 글자 '배'가 가진 서로 다른 뜻을 짧지만, 의미 깊게 표현했다. '병'의 경우는 "놓치면 깨지고 품고 있으면 아프다"라며 이도 저도 못 하는 모습을 빗대 표현했다. 국어학자들이 읽으면 말장난일 수 있는 표현을 문학적 표현으로 읽는 재미와 생각 거리를 주는 글로 만들었다.
시대 공감과 비판400여 페이지에 300개가 넘는 단어를 시인의 시각을 담아 사전으로 만들면서 아름답고 재치있는 시적인 표현만 담는 것은 아니다. 문학인으로서 이 시대를 관통하는 시각과 철학을 담은 비판도 눈에 띈다.
'솜'은 "법을 어긴 권력에 법이 휘두르는 방망이"이고 '쇼'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국민을 향해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행동"이라 정의했다. 두 단어 모두 각 한 문장으로 정의했는데 짧아서 오히려 단호한 비판의 의도가 드러나 보였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마음사전>을 언급하며 새로 낸 <한 글자 사전>을 "10살 터울 자매"로 표현했다. 이 책에 여성성을 부여한 것일까?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단어도 여럿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단어는 다음과 같다.
색빛이 없으면 색도 존재하지 않는다. 색은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사물에 반사되는 빛의 파장이다. 가시광선만을 색으로 인식한다. 물체가 흡수한 색이 아니라 반사한 색을 인식한다. 그러니 색을 쓰는 여자는 없다. 색을 밝히는 남자의 시선에만 있다. (p. 221)
여여자들은 환영받지 못한 여동생으로 태어나 여고생이 되었다가 여대생이 되고, 여급에서 여사원에서 여사장이, 여가수나 여의사나 여교사나 여교수나 여류 화가나 여류 작가로 산다. 남자들이 환영받는 남동생으로 태어나 고교생이 되었다가 대학생이 되고, 사원에서 사장이, 가수나 의사나 교사나 교수나 화가나 작가로 사는 동안에. (p. 266)젠더 관점에서 보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순을 '색'과 '여'라는 단어를 이용해 상대적 의미로 표현했다. 시인인 저자는 국어대사전에 의존해 단어와 철자확인 등 작품활동을 하겠지만 사전이 정의하지 않은 그 넓은 행간을 답답해한 건 아닐까? 그래서 그 행간과 의미를 찾아서 적어나간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 개의 감탄사라도 길거나 짧을 때, 높거나 낮을 때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전에는 없는, 행간의 의미를 적어 나간 것은 아닐까?
나의 사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글자 단어든 여러 글자의 단어든 기존 사전에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사유를 끌어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나 책을 읽으며 혹은 단어들을 모아 문장을 만들 때 사전적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 단어가 많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음사전>을 다시 읽었고, 다시 한번 더 <한 글자 사전>을 읽었다.
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마음산책,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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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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