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졸업90년 2월. 박래전 열사 명예졸업식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동생은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학교에서 문학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면서 지하 서클에 가담하여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학생운동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먼저 1학년 말에 학습모임을 다녀오다가 경찰 불심검문에 걸렸고, 이른바 불온서적을 빌미로 학교는 지도휴학을 강요했습니다. 휴학하지 않으면 제적시키고 감옥 보내겠다는 협박을, 경찰의 사주를 받아서 학교가 한 것인데 걱정이 많은 부모님이 시골서 올라와서 동생을 휴학시키고 끌고 내려갔습니다.
1983년, 여름에 군에 가기로 한 동생보다 제가 먼저 학내시위 때 연행되어 강제 징집당했습니다. 우리 형제는 각각 1985년 여름과 겨울에 제대를 했고, 먼저 제대한 저는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운동을 한다고 인천으로 내려갔고, 동생은 1986년 1학기에 복학했습니다. 그런데 1986년 5월 당시 해고자였던 저는 한미은행 점거농성 사건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고, 이 일로 걱정 많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서 동생은 다시 휴학을 하고는 시골로 내려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해에는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해였지요.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리기로 된 아시안게임에 반대하는 투쟁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동생은 학교에 올라왔다가 시위에 쓸 화염병을 나르다가 경찰에 붙잡혔고,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에 보름 동안 구류를 당했습니다. 마침 그때는 추석 명절 때였습니다. 시골서 농사지어서 두 아들 대학을 보냈던 부모님은 억장이 무너졌지요. 이때의 상황을 동생이 시로 남겼습니다.
어떡할려고 그러니 이노무 새끼들아 난 어떡하라고 두 형제 다 유치장에 있어 나와라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떡하란 말이냐 애들아
노량진 유치장에 면회 오신 어머님 나이 오십에 칠십 나이 겉늙은 할머니 주름 가득한 어머님 - 박래전 유고시, 「어머님 말씀」 전문 87년 6월 항쟁 중에는 장안동 대공분실에도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6월항쟁이 실패했다면 동생이나 저나 더욱 큰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6월항쟁이 노태우의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귀결되면서 저는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동생은 더는 대공분실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6월 항쟁, 그리고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에서 전개된 노동자대투쟁으로 세상은 일대 전변이 일어났고, 군사독재정권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의해서 종식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들이 서로 대통령 해먹겠다고 싸우다가 그해 12월 선거에서 학살의 주범인 노태우가 당선되는 어처구니없는 꼴을 만들었습니다.
우울했던 1988년 1988년의 시작은 우울했습니다. 대선 개표 때 부정투표함이 구로구청에서 발견되어 시민들이 투표함을 지키는 싸움을 했으나 그것도 진압되었습니다.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해 싸웠으나 합법적인 선거로 학살의 원흉이 대통령이 된 상황이었고, 6월 항쟁을 일구었던 운동진영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낳았습니다.
그 겨울에 동생은 자신이 속했던 정파의 결정으로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복학생인 동생이 인문대학생회장이 된다는 게 마뜩잖아서 말려봤지만 조직 내에서 결정한 사항을 물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동생은 건강상태도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병원 좀 가라고 돈을 어떻게 마련해주면 후배들과 술 먹고 들어오고는 했습니다. 학생운동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일들에 이리저리 치여서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렸는데 거기에 단과대 학생회장까지 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은 인문대 학생회장에 나가면서 부지런히 학우들을 만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알기(주체) 인문'을 기치로 내걸고 자신을 헌신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동생은 인문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그 무렵 실시된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정치지형이 형성되었습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5공청산특위, 광주특위가 만들어져서 국민들이 광주의 진상과 5공화국 시기의 폭정에 대해서 알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졌습니다.
학살원흉은 처단되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