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발포 거부' 안병하 치안감 유족들 "고통의 끝이 안 보여"

순직 인정받았지만 이중보상 환수 직면... "1억 내놓으라는 광주시, 해준 게 뭐 있나"

등록 2018.05.09 10:34수정 2018.05.0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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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 안병하 치안감(아랫줄 가운데)이 생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위쪽 왼쪽부터 안 치안감의 셋째 아들 호재 씨, 둘째 아들 춘재 씨, 첫째 영재 씨. 안 치안감 왼쪽은 아내인 전임순 여사. 오른쪽은 안 치안감의 큰형수인 신영은 씨. <안호재 씨 제공>

고 안병하 치안감(아랫줄 가운데)이 생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위쪽 왼쪽부터 안 치안감의 셋째 아들 호재 씨, 둘째 아들 춘재 씨, 첫째 영재 씨. 안 치안감 왼쪽은 아내인 전임순 여사. 오른쪽은 안 치안감의 큰형수인 신영은 씨. <안호재 씨 제공> ⓒ 광주드림


"정부에서 이렇게 나올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고통의 끝이 보이질 않네요."

5·18민중항쟁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의 셋째 아들 안호재씨는 지난 4월22일 "국민을 지키다 순직한 경찰 유족은 불이익을 당해야 합니까"라는 제목으로 청와대에 국민청원(5월22일까지 진행)을 냈다( 국민청원: 국민을 지키다 순직한 경찰 유족은 불이익을 당해야 합니까?).

"30여 년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청원과 함께 올린 글의 일부다. 어찌된 사연일까? 지난 4일 안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국민청원을 낸 이유에 대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 고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5·18 이후 직위 해제돼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의 만행에 협조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8년을 투병하다 1988년 10월10일 60세 나이로 사망했다. 이를 지켜본 유족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유족들은 정부의 여러 기관을 찾아다녔다.


a  경기경찰국장 시절 안병하 치안감(왼쪽)의 모습. <안호재 씨 제공>

경기경찰국장 시절 안병하 치안감(왼쪽)의 모습. <안호재 씨 제공> ⓒ 광주드림


"아버님의 명예는 찾아드리려고 했죠. 순직으로 인정되면 국립묘지에 갈 수 있어서 관련 부처를 찾아갔어요. 치안본부(현 경찰청), 연금공단 다 돌아다녔는데 서로 자기네가 할 게 아니다면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광주시 97년 5·18 희생 인정 9100만 원 보상
 
막막해지자 광주시로 눈을 돌렸다. 1992년 광주시청에서 5·18 관련 보상 신청을 접수할 때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처음에 낸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93년 재심을 신청하고 이듬해인 1994년 안 치안감에 대한 불법 구금과 고문 사실을 인정해 유족 전체에 총 832만 원의 '기타지원금' 지급이 결정됐다.


유족은 이에 대해 "잘못됐으니 그 보상금을 취소하고 다시 판정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1997년 최종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 9100만 원(앞서 결정된 800만 원 포함)을 지급 받게 됐다.

당시 광주고등법원은 판결문에서 고 안병하 치안감에 대한 강제 해직,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 당한 피해 사실을 명시했으나 안씨는 "온전한 명예회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지적했다.

"그 재판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못했어요. 단순히 광주 5·18과 관련한 희생자로만 인정해 지원금 지급을 결정한 것뿐이었죠."

'광주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 받은 것도 재판이 끝나고 6년 후인 2003년 4월이었다.

"2003년에 '광주 민주화 유공자 증서'가 집에 왔는데, 이것도 아버님은 공직자였지 '민주운동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폐'가 있었죠. 자기네들 행정 편의를 위한 것이지 순수한 명예회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봤어요."

안 치안감이 사망한 지 17년, 강제 해직된 지 25년이 된 2005년에서야 보훈처는 순직을 인정했다. 연고도 없던 충북 충주시의 한 공원묘지에 안장된 안 치안감은 국립 현충원 경찰묘역에 다시 안장됐다.
 
보훈처 2005년 순직 인정... 명예회복 급물살

지난해 11월 정부가 1계급 올린 치안감으로 특진 추서하면서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특진했고, 앞서 같은해 8월 경찰청은 '올해 경찰 영웅'으로 안병하 치안감을 선정했다.

a  지난 2017년 11월 전남경찰청에서 열린 고 안병하 경무관(1계급 특진 전 계급) 흉상 제막식 모습. <안호재 씨 제공

지난 2017년 11월 전남경찰청에서 열린 고 안병하 경무관(1계급 특진 전 계급) 흉상 제막식 모습. <안호재 씨 제공 ⓒ 광주드림


또 전남경찰청에는 그의 추모 흉상이 세워지는 등 '5·18 숨은 영웅'의 명예회복은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유족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행정소송을 통해 2010년부터 안씨의 어머니인 전임순 여사가 안 치안감의 순직 인정에 대한 보훈 급여를 지급 받기 시작하자 이중 보상을 이유로 1997년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에 대한 환수 명령이 내려진 것.

유족은 이를 취소해 달라고 정부를 상대로 또 법적 다툼에 나섰지만 지난해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당장 1억 원에 가까운 돈을 내놓으라는 광주시의 '통보'에 안씨를 비롯한 유족은 막막할뿐이었다.

"사실 1997년 지원 받은 돈도 아버님 병원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어요. 너무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님은 필요한 수술도 못 받고 돌아가셨는데, 그것마저 내놓으라니. 지원금 중 일부만 반환하면 안 되냐고 건의해 봤지만 광주시는 그것도 안 된다, 가족들이 받았던 거 다 내라고만 하더라구요."

안씨는 "배신감을 느낀다"며 광주시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동안 광주시가 순수하게 해준 건 없습니다. 1997년 지원금도 재판해서 받은 거고. 지난해 첫 추모식이 열리기 전까진 '고맙다'는 연락 한 번 없었어요. '돈 배상하라' '반납하라'는 것뿐이었죠."

a  지난해 5월 5·18 당시 순직한 정충길 경사, 강정웅 경장, 이세홍 경장, 박기웅 경장 등을 위한 추모식이 서울 동작구 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서 진행됐다. 이는 “5·18 때 순직한 후배 경찰관들을 챙겨달라”는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안호재 씨 제공>

지난해 5월 5·18 당시 순직한 정충길 경사, 강정웅 경장, 이세홍 경장, 박기웅 경장 등을 위한 추모식이 서울 동작구 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서 진행됐다. 이는 “5·18 때 순직한 후배 경찰관들을 챙겨달라”는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안호재 씨 제공> ⓒ 광주드림


특히, 안 치안감은 물론 5·18 당시 경찰의 역할에 대한 광주시 차원의 제대로 된 조사와 연구가 없는 점도 유족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기울이지 않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꼬집었다.
 
"광주시, 97년 보상금 환수 명령 억울…국민청원"
 
더 방법이 없던 안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민청원을 냈다. 그는 2005년 순직 인정에 대해 "정부가 뒤늦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7년 보상금을 반납하면 1980년 6월(강제 해직)부터 2005년 9월(순직 인정)까지 25년간 아버님과 유족의 고통에 대한 아무런 보상과 책임이 없는 것이에요."

정부의 무책임으로 인해 30여 년 세월 동안 수도 없는 소송과 재판에 매달려야 했던 결과가 '이중보상'이란 잣대였다. 하여 그는 국민청원을 통해 "1997년 보상금을 내놔야 한다면 1980년부터 2005년 9월까지 25년간의 밀린 급여와 연금 등을 지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부는 저희가 보상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뭘 또 청원이냐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아버님이 광주시민을 구했다고 밝혀지니까 광주에서 뭔가 큰 보상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이제라도 유족들의 현실이 제대로 알려지고 잘못된 것들이 바로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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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제휴사인 <광주드림>에 실린 글입니다.
#안병하 #5.18 #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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