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수최덕수의 학창시절
최덕수열사추모사업회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87학번. 최덕수는 6월 항쟁의 한 가운데를 겪었다. 수많은 죽음으로 얼룩진 민주주의가 성큼 다가왔다고 믿고 싶었다. 현실은 달랐다. 변한 게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광주의 진실을 바로 볼 생각이 없었다.
1980년, 광주의 항쟁, 광주의 외침, 광주의 죽음은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8년이 지났지만 여전했다. 그게 최덕수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광주의 외침은 여전히 극소수 폭도들의 난동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예속적 독점재벌과 폭력적 살인 군부정권과 외세, 이것은 지난 80년 광주민중항쟁과 민주화 투쟁을 통해 확인된 한국 현대사의 큰 장애물이다. 역사는 이것이 바로 잡혀야 할 시기에 바로 잡혀야 하며, 그 시기를 놓치면 빗나간 역사는 보다 더 큰 희생과 재물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최덕수 열사의 광주민중항쟁 성명서 중에서)최덕수는 '빚고을 광주'가 피의 현장인 '핏 고을'로 남는 것에 분노했다. 진실에 다가설 기회를 더는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로잡지 않으면 변할 리 없다고 믿었다. 이다음은 더 큰 희생이 필요할 거라고 썼다. 최덕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을 외쳤다. 그리고는 단국대 시계탑 앞에서 제 몸에 불을 붙였다. 1988년 5월 18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