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 열사의 마지막 여행구로구청 사건을 겪은 뒤 변산으로 여행을 떠난 조성만. 죽음 직전 마지막 여행이었다.
오마이북
한반도 통일을 꿈꾸다1988년 5월 14일. 당시 함께 살던 술에 취한 후배를 자취방에 눕힌 그는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편지를 써 내려갔다. 잠에서 깬 후배가 "형, 왜 안 자요?"라고 물었을 때도 "정리할 게 있다"라며 다시 펜을 들었다. 자신의 유서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아멘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한반도의 통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 됩니다.' (조성만 열사의 유서 중) 조성만의 부모가 복사해 장롱 서랍에 간직하고 있는 그의 유서에는 '통일'이 새겨져 있다. 아무리 누르고 여러 번 생각해도 제 뜻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제 목숨을 통일과 민주주의 앞에 던졌다. 군사 정권하에서 민주주의가 찢겨 지고 한반도 평화가 먼 이야기였던 때다.
어둠을 응시하다
조성만이 투신하기 1년 전만 해도 민주주의를 향한 꿈이 피어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지키려 눈을 켰다. 조성만 역시 그랬다. 87년 12월, 대선에서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던 때 그는 구로구청에서 투표함을 지켰다. 구로구청에서 백지 투표용지가 다수 들어있는 투표함이 발견됐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려는 시민들이 구로구청에 모였다.
조성만은 구로구청에서 밤새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투표함을 지켰다. 4000여 명의 전경이 구청을 포위했다.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군홧발에 차이고 곤봉에 맞았다. 밟히고 짓이겨지며 시민들이 하나둘 끌려나갔다.
백골단의 추격에 쫓기던 조성만은 옥상에서 최루탄을 맞았다. 고통을 못 이겨 옥상에서 몸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투신했다. 진압 작전 막바지, 조성만 역시 끌려나갔다. 유치장에서 그를 봤던 조성만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자신이 사준 회색의 오리털 잠바가 새까맸다. 아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 날 이후 조성만은 조금 더 말수가 적어졌다. 명동성당 본당 뒤편의 성모동산을 멍하게 배회하거나 밤늦은 시간까지 성당 기도실에서 기도했다.
평소 조성만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행동도 있었다. 어느 날, 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이하 가민연)' 술자리에서 조용히 있던 그가 주먹을 움켜쥐어 소주잔을 깨뜨렸다. 피가 흥건한 손으로 "이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그의 어둠이 짙어졌다.
온몸으로 통일을 바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