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내 아들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막내 아들의 추모식에 참석한 어머니
박래군
어머님은 이제 여든 일곱이신데, 연세가 많으시니 예전만큼 일은 못하시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가는귀를 먹고 눈이 침침해서 힘들어하시지만, 매일 밤이면 전화를 해서 집에 잘 들어갔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물으신다. 어머님은 네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되셨고, 지금도 일요일이면 성당에 꼬박꼬박 다니시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시골 농사는 형님이 안산에 있으면서 오고가면서 짓고 있다. 형도 많이 늙었지. 허리 아파서 일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포도밭을 더 늘리는 걸 보면 아버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네가 그리도 좋아했던 조카 준열이와 진주는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지. 나는 네 학교 후배와 결혼해서 딸 둘을 낳았다. 네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했을까? 그 딸들이 벌써 네 나이만큼이나 커 버렸다. 그만큼 세월은 많이 흘렀다. 30년, 예전 사람들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말했지만, 그 정도의 변화 정도가 아니다. 하늘만 그대로 있고, 산도 논밭도 바다도 모두 변해 버렸다. 고향도 옛날의 고향이 아니고, 동네마다 공장들이 들어찬 마을이 되어 버렸다.
30년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유서, 네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 유난히 "마지막 죽음"을 강조했다.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버리려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는 안 되기에. 나의 죽음이 마지막 죽음이길 바란다. 나의 투쟁이 이 땅의 백만 학도에게 불을 당기는 투쟁이 되길 바란다." "나의 죽음을, 선배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나의 죽음이 마지막 죽음이길 바란다.""어머님, 아버님. 저는 두 분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니면 더 많은 어머님, 아버님들의 가슴을 에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불을 지르거나 몸을 던지면서 죽어갔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의, 사랑스러운 두 분의 아들의 목숨을 민주의 성단에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네 죽음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생존권을 위해, 통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그런 죽음들을 막아달라고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죽음의 행렬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30년은 더 이상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극단적인 방법으로 호소하며 죽음을 결단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세월이었던 듯도 싶다. 네가 떠난 뒤에 유가협에 들어가서 억울하게 죽어간 아들딸을 둔 부모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봤다.
서른 살 전후의 나이에 나는 분신, 투신, 의문사 현장들을 찾아가야 했고,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게는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그때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유가족들과 말했던 건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아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죽음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런 결단이 쉽게 잊히는 세상에서 오히려 살아남아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른 죽음들이 눈에 들어왔단다. 결단을 하고 투쟁을 촉발하려는 그런 죽음들에 가려졌던 죽음들이 있었다. 세상은 많이 험해져서 형식적으로 민주주의가 되었다고 하지만 더욱 힘든 세상에서 사람들은 소리 없이 조용히 죽어갔고 있었다. 매년 자살자만 1만5천 명이 넘고, 거기에는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전 계층이 해당하고 있지.
용산참사에서는 공권력이 불로 국민을 죽이고, 백남기 농민도 물대포로 죽이고, 세월호에서는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을 비롯한 승객 304명을 죽게 하고…시험에 비관해서 죽게 하고, 현장실습 나갔던 고등학생이 죽어나가고, 비정규직이 기계에 말려서 죽고, 여성들은 밤길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고, 데이트폭력으로 죽고, 성소수자들은 세상의 혐오에 시달려 죽고, 노인들은 먹고 살 일이 막막해서 죽고. 이 세상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참 우울해진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이런 자괴감도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