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한껏 취해 서로의 언어로 랩 배틀을 했다.
김강현
즉석에서 힙합음악을 반주로 하는 러시아어와 한국어의 랩 배틀이 펼쳐졌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힙합가수의 몸짓을 생각하며 말도 안 되는 랩을 했고, 가끔 욕이 나올 때는 그들도 알아듣는지 크게 호응했다.
상대가 랩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러시아의 욕이나 말을 알지도 못하지만 '아 저건 욕이다' 싶은 단어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어차피 누가 더 잘했는지는 판단할 수 없는 랩 배틀은 음악이 두 곡쯤 이어지고 나서도 계속됐고, 앞에 있던 보드카 병을 부딪친 후 어깨동무를 하고 병나발을 불고야 끝이 났다. 그리고 내 기억도 함께 끝났다.
보드카도 숙취가 있다눈을 뜨니 어제 짐을 풀었던 방이다. 침대가 'ㄷ'자 형태로 세 개 있는 방이었는데, 나는 침대 사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보드카가 숙취가 덜하다고는 하지만, 술이 깨질 않아 한참을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지난밤에 파티를 한 친구들은 이미 집에 가고 없었고, 집 주인의 동생만 남아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뒷문으로 나가 보니 바이크는 무사했다. 바이크에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건물 그늘에 가려 공기는 선선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밝은 대낮이다. 풀벌레 소리가 낮게 들리고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도 들렸다.
다 좋았다. 내 입에서 나는 술 냄새와 깨질 것 같은 머리 말고는... 겨우 일어나 짐을 챙기고 숙소를 나가기 위해 가격을 물어봤더니 어제 내가 시계를 선물로 준 친구가 이미 다 계산했다고 한다.
끝까지 고마운 친구들이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음식과 술값까지 다 계산해주고 가다니. 다시 한 번 러시아 라이더들의 정을 느꼈다.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위치를 검색하고 바로 그곳을 향해 달렸다. 머리가 너무 아파 도착하자마자 바로 잘 생각이었지만, 그 숙소에선 우리에게 '도큐먼트(=서류)' 제출을 요구했다.
지금까지 서류를 제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작스런 요구에 우리는 당황하며 여권 등을 보여줬지만 그게 아니란다. 아마도 체류 서류나 거주지 등록 서류 등을 말하는 것 같은데, 한국과 러시아 간 무비자 여행이 가능해진 것을 모르는 듯했다.
결국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두 군데 정도 방문했지만 마찬가지였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찾은 마지막 숙소에서 겨우 받아줬다.
크고 낡은 호텔 건물 전체가 숙소였는데, 와이파이도 잘 되고 나름 깔끔했다. 2인실 방 두 개를 잡아 바로 짐을 풀고 밥을 먹기 위해 숙소를 나와서 조금 돌아다니다 중국 음식점을 발견했다. 해장이 간절했던 나는 '그래도 중국음식이라서 입맛에 맞을 거야'라 생각하고 탕수육과 붉은색 탕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