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일간지에 실린 한울회사건 관련 기사
박재순
내가 오랜 세월 연락도 되지 않고 갇혀 있을 때 가족들, 특히 늙으신 어머니의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맘 졸이며 걱정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한겨울이 되면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었던 어머니는 감옥에 있는 나를 생각하시며 추운 밤중에 부엌에 홀로 서 있어 보기도 하시고 온기 하나 없는 담벼락 아래 서 있어 보기도 하셨다. 어디에 서 있어 보아도 어머니는 추운 겨울밤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던 어머니는 결국 입에서 피를 토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추운 감옥에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아주 걱정스러웠고 안타까웠다."
"광주시민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비판한 것이 유죄"-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선생님은 이 한울회 사건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한 사건을 어떻게 법원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나? "만일 노무현 정부 이후에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기 때문에 사법부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내릴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사건의 조사를 신청하는데 게을렀다. 같은 시기에 재판을 받았던 아람회, 오송회가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고 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울회도 재심 청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 시절인 지난 2010년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지난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믿기지 않았다.
더욱이 고등법원의 기각 사유가 황당하고 기이했다. 내가 재심을 청구한 가장 큰 이유는 한울회가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내가 한울회모임에서 한 발언으로 나는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들은 반국가단체구성은 유죄이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내가 한울회모임 때 발언한 것도 민주화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저희끼리 해 본 소리'라면서 유죄라고 판결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내가 비판한 것이 유죄라는 것은 사리나 법리에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이미 전두환·노태우는 국가변란을 일으킨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고 이들이 저지른 광주시민 학살은 범죄이고 이들이 선포한 계엄령은 불법 무효라는 판결이 사법부에서 내려졌다. 그런데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부정권과 군대를 비판한 것이 유죄라고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재심 기각판결은 어이없고 터무니없는 사법적 만행이라고 생각된다. 담당 변호인들도 재심 기각 판결문을 받아보고 말이 되지 않는 판결이라고 상고하겠다고 하였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렇게 황당한 판결을 한 것은 내가 우리를 기소했던 정용식 검사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대법원을 두 차례 오가며 결국 유죄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책임과 잘못을 강력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과 사법부의 치명적인 잘못과 불의를 강력하게 고발하고 규탄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이런 무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짐작한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 사건의 조사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과 검찰의 불법과 한울회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자료와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법원에서 새로 다룰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도 재심을 기각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대법원에 상고한 결과 지난 2015년 초에 대법원은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내가 발언한 것은 유죄라고 할 수 없으니 재심을 허락한다고 판결하였다. 유죄판결을 받았던 6인 가운데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발언을 했던 이규호 선생과 나만 재심이 허락되고 다른 4인은 재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여간 2015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들은 대법원이 제시한 지침대로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로 하고 광주민주화운동 발언만 심리하자고 주장하였다.
나와, 다른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은 강력하게 사건 전체를 재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그래서 나와 이규호 선생은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하며 34년 전에 우리를 재판한 검사와 판사들이 직권을 남용하여 불의와 불법을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울회 사건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 사법부의 정의를 세울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법정에서 판사들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검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2015년 5월에 재판이 시작되어 2017년 1월에 재판이 끝날 때까지 판사들이 세 차례 바뀌었다. 첫 번째 판사는 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이동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부장판사는 변호사들을 압박하면서 형량을 감경해주겠다며 재판을 속히 끝내자고 하였다. 피고들의 말을 들어주는 듯이 하다가는 피고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재판을 끝내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나서 크게 싸워보려고 하다가 변호인과 의논하여 판사들의 재판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규호와 함께 재판에 항의하는 글을 써 보내고 그 무렵 몸을 다쳤던 나는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번째 재판부도 인사이동을 하게 되어 재판부가 바뀌게 되었다. 새로 배당된 재판부는 부담을 느꼈는지 우리 재판을 다른 재판부로 넘겨버렸다. 네 번째 맡은 재판부는 우리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우리가 신청한 증인 4인의 증언을 듣기로 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예아무개, 임아무개는 50 중년이 되어 증인으로서 35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35년 전을 회상하며 눈물을 철철 흘렸고 당시 경찰, 검사, 학교의 압박과 회유로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하였고 그때 그들의 선생이었던 나와 이규호에 대해서 당시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사죄한다고 하였다. 당시 대학생이었고 현재 공주사범대학교 교수인 장수명도 눈물을 흘리며 한울모임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했는지를 증언하였다. 당시 방위병으로서 군사재판을 받았던 김종생은 증언 당시 큰 교회 목회자였다. 김 목사도 눈물을 흘리며 한울모임이 순수하고 진지했던 신앙 생활공동체였음을 증언하고 당시 군 검찰의 고문과 압박, 모욕과 학대가 극심하여 화장실에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여 충격을 받았다. 이 자리에 다 쓰지 못하지만 네 사람의 증언은 진실하고 감동적이었다.
증인들이 그처럼 절절하고 감동적으로 진실을 말하고 피고인과 변호인이 아무리 간절하고 절실하게 양심과 법에 따라 재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법원의 지침대로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발언은 무죄로 보고 징역 2년 6개월을 집행유예로 판결하였다. 집행유예로 형량을 감경하면서 국가배상신청서를 주면서 배상신청을 하라고 하여 배상신청을 했으나 결국 그마저 배상 불가 판정을 받았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철저하게 한통속으로 움직였다"- 한울회 사건으로 6명이 재판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2015년 재심 신청 결과 4인은 기각되고 선생님과 이규호 선생 두 분만 재심이 허락되어 재심 절차를 밟았다. 당시 고등법원과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받으면서 느낀 점은? "한울회 사건의 재심과 관련하여 내가 느낀 것은 적어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는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철저하게 한통속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검사동일체라는 말이 있듯이 법관동일체 원칙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울회 재심 사건에 대해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파괴하는 사법적 폭력이고 농단이라고 느꼈다. 양승태가 지배하는 사법부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군사독재 시절의 국가주의적 폭력과 만행을 정당화하고 옹호함으로써 역사의 시곗바늘을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의 사법부와 박근혜 정권과 코드를 맞춘 양승태 대법원의 차이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였다. 물론 차이가 없지는 않았다. 아니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35년 전 대전에서 1심판결을 받을 때는 법정에서 검사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고 판사들은 고양이 앞의 쥐보다도 더 무기력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판사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고 검사가 완전히 법정을 지배했다.
그러나 2015~2016년 한울회 재심을 다루는 서울고등법원의 법정에서는 판사들의 권세와 위력이 검사와 변호인에 대하여 강력하고 위압적임을 느꼈다. 피고들이 과거의 검사를 심하게 규탄하고 책망하자 검사들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검사는 재판이 끝날 때마다 우리를 따라오면서 우리에게 사과하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불의하고 위선적인 사법부에 국민의 통제에서 벗어난 권력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 지난 2013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로 긴급조치를 포함한 수많은 과거 국가폭력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소송은 소멸시효 등 문제로 패소했다. 게다가 배상금을 삭감하는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국가가 희생자 유족을 상대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는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금도 이중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지금도 국가폭력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입장에 서 있는 (대)법원과 '국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의 시효를 갑자기 엄격히 제한하고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핑계를 내세워 국가소송을 기각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부정하고 국민을 보호하고 보살필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을 국가의 노예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군국주의, 국가주의의 낡은 국가관을 가지고 사법부가 재판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는 국가가 저지른 불법과 범죄를 바로 잡을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 사법부가 법을 악용하고 조작하여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면제해 준 것은 사법부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짓밟는 국기문란을 일으킨 것이고 국민주권을 기본으로 하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사법부와 국가는 그동안 양승태가 지배한 사법부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사법적 농단과 만행을 바로 잡을 책임과 의무가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국가로부터 불법적인 폭력을 당한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하는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지켜야 할 국가와 사법부의 마땅한 도리이고 책임이다.
국가가 불법 부당하게 국민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면 당연히 국가는 국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배상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도록 국가는 적극적으로 알리고 안내하고 권유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 나아가 국가는 과거 자신의 잘못과 불법을 국가 스스로 바로잡아 가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 배상신청의 시효를 없애고 피해자들이 배상신청을 하도록 협력할 뿐 아니라 국가가 피해자들을 대리해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도록 법적, 행정적 절차를 밟아가야 한다."